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8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2부. 무채색의 시간

제8장.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


그날 이후, 장미는 살아있는 유령이 되었다. 병실이라는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채, 그녀의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고여 썩어갔다. 세상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만져질 듯 두꺼운 유리벽을 세우고, 모든 것을 거부했다. 어머니가 애써 만들어 온 음식은 식도를 넘어가는 감각 자체가 고문처럼 느껴져 손도 대지 않았고,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와도 그의 목소리는 두꺼운 유리벽을 통과하며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동생 유진이 혈압을 재기 위해 팔을 잡으면,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힘없이 몸을 맡겼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의 먼지처럼 떠다녔다. 방구석에 놓인, 화면이 검게 죽어버린 TV가 산산조각 난 그녀의 마음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창가 침대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현우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두는 모습을, 마치 오래된 흑백 필름 속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처럼 아프게 지켜보았다. 며칠을 망설였다. 섣부른 위로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동정 어린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는지 그는 뼈저리게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가 부서져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장미가 깨진 휴대폰 액정의 거미줄 같은 균열을, 마치 자신의 부서진 삶의 지도를 더듬듯 하염없이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있을 때였다.


현우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이어폰 한쪽을 그녀의 귀에 꽂아주었다. 어떤 설명도, 어떤 위로도 없었다. 그저 행동뿐이었다. 이내 공기처럼 스며드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슬픔을 강요하지도, 억지로 끌어올리지도 않는,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듯한 선율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그녀의 모든 신경과 고통이, 영혼의 침술처럼 스며드는 그 선율에 잠시나마 무디게 마비되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곡이에요. 그냥…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비우고 싶을 때 들으면, 조금은 조용해져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폰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거절하지 않겠다는, 아주 작은 소극적인 수용의 신호였다.


다음 날 오후, 현우는 창밖을 보며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어제보다는 얼굴색이 낫네요." 그 사소하고 평범한 한마디가 그들 사이의 두 번째 대화가 되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아픈 사람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의 암호였다. 장미가 항암치료 후유증인 역한 쇠 맛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면, 현우는 어디선가 구해온 레몬 사탕을 간호사 몰래 건네며 윙크했다. “이거 물고 있으면 잠시 미각이 마비돼요. 일종의 불법 마약이죠.” 그들은 병원 밥의 맛없는 반찬에 별점을 매기고, 회진 도는 의사들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흉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피어나는, 처절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블랙 유머였다.


어느 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 현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털어놓았다.


“저는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함께 있어 주지는 못했어요. 아픈 건 그녀인데, 그걸 무력하게 지켜보는 제가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이었죠. 그래서 일에 도망치고, 술에 도망치고, 감정적으로는 단단한 벽을 쳤어요. 그녀가 정말 필요로 했던 건 제 지갑이 아니라, 제 손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고통을 함께 바라봐 주는 제 눈빛이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죠.”


그의 고백은 장미의 마음속 단단히 닫혀 있던 문 하나를 조용히 열었다. 민준. 그의 고백은 민준을 이해하게 했다. 그것은 결코 용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는 남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위태롭고 겁에 질려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동생 유진이 병실을 찾았다. 그녀는 장미가 현우와 ‘누구 링거대가 더 시끄럽게 삐걱거리나’ 내기하는 시시한 농담에 희미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미소였다. 유진은 언니를 웃게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런데 저 낯선 남자는, 너무나 쉽게 언니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심장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소외감. 유진은 언니의 세계에, 자신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픈 사람과 그 곁을 지키는 사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 뒤, 현우는 장미가 멍하니 깨진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성공 가도를 달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민지에 대한 기사를. 장미의 얼굴에는 체념과 꺼지지 않은 분노의 불씨가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부서진 것만 보고 있으면, 영원히 부서진 채로 남게 돼요.”


현우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어떤 위로보다 단단한 힘이 있었다. 장미가 힘없이, 거의 공기뿐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난 여기에 갇혀있는데. 아무것도 아닌데.”


“몸은 여기에 있죠. 하지만 당신의 재능은 아니에요.”


현우는 휠체어를 돌려 장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동정이 아닌, 창작자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당신, 디자이너라면서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장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목소리를 던졌다.


“그럼 복수도 디자인해 봐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처절하게.”


그 한마디는 벼락처럼 장미의 영혼을 내리쳤다. 복수. 피와 증오로 얼룩진 단어가 아니었다. '디자인'. 그녀의 삶 자체였던 그 단어와 결합하는 순간, 복수는 파괴가 아닌 가장 완벽한 창조의 행위가 될 수 있었다. 현우는 그녀의 상처를 위로해 준 첫 번째 사람에서, 그녀가 다시 일어서서 싸우도록 등을 떠민 첫 번째 조력자가 되었다.


장미는 깨진 휴대폰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항암치료로 핏줄이 비치고, 여기저기 주삿바늘 자국이 남은 앙상한 손. 하지만 그 손은 한때 세상을 그리고, 색을 빚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던,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감각이, 잊고 있던 창조의 열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