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제9장. 가장 깊은 밤
그해 여름, 장마는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퇴원한 현우의 빈자리는 병실의 공기를 더욱 차갑고 밀도 높게 만들었다. 아픈 사람들만의 언어로 서로를 위로하던 유일한 동맹을 잃은 그녀는 다시 완벽한 고립 상태로 되돌아갔다. 현우가 떠난 후, 병실의 시간은 다시 멈췄다. 그의 농담이 채우던 공백을, 이제는 소독약 냄새와 기계음, 그리고 그녀 자신의 절망이 더욱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밤새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며 도시의 불빛을 무질서한 색의 강물로 번지게 했다. 그 풍경은 마치 눈물로 얼룩진 수채화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듯한 빗소리만이, 오히려 그녀 내면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날 오후, 중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장미는 며칠간 컨디션이 좋아 아주 작고 연약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복수를 디자인하라’던 현우의 말을 되새기며, 아주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 지독한 터널의 끝이 보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모니터에 떠 있는 흑백의 영상과 무미건조한 숫자들, 즉 ‘환자 김장미’가 아닌 ‘데이터 김장미’만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차트 위에 떠 있는 데이터만을 보며, 마치 날씨를 전하는 기상캐스터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재발 가능성이 아직 높습니다. 계속해서 추적 관찰이 필요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지루한 서류를 읽는 사무원 같았다. 희망을 품고 온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그 철저한 무심함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그 말은 "너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차가운 선고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장미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마침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병실의 인공적인 정적보다 더 크게, 그녀의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고통은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민지와 민준의 배신이 남긴 상처는 항암치료의 부작용보다 더 깊숙이, 더 집요하게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몸은 병실에 있었지만, 마음은 모든 것이 불타버린 텅 빈 폐허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현우가 불을 붙여준 복수라는 작은 불씨마저, 절망이라는 차가운 비에 젖어 꺼져버린 듯했다.
"왜 나만 이렇게 아프고, 외로운 걸까? 나는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그녀의 질문은 메아리 없이, 눅눅한 병실 공기 속으로 무력하게 흩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침대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숨겨둔 하얀 약병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수면제. 얼마 전, 잠 못 이루는 언니를 보며 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네준 것이었다. “너무 힘들면 한두 알만 먹고 푹 자. 잠이라도 잘 자야 이겨내지.” 동생의 따뜻했던 격려가 이제는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잔인한 유혹처럼 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뚜껑을 열자, 하얀 알약들이 죽음의 눈송이처럼 손바닥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작고, 차가운 알약들이 그녀의 손금 위에서 구르는 감촉이 섬뜩할 정도로 생생했다. 마치 그녀의 짧았던 삶을 기리는 작은 묘비들 같았다.
그녀가 약을 쥔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물이 그리는 불규칙한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아주 사소하고 행복했던 감각들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새하얀 종이의 매끄러운 감촉, 잘 깎인 연필심이 종이에 닿을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 완벽한 색 조합을 찾아냈을 때 심장이 멎을 듯한 희열. 이대로 가면, 다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겠구나. 그녀의 본능이,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그 본능적인 상실감이 잠시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무게는 더 무거웠다. 그녀가 다시 마음을 굳혔을 때, 이번에는 딸 지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엄마, 하늘은 왜 슬프면 파란색이야?" 아이의 엉뚱하고 순수한 질문. 책임감보다 앞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영원히 해줄 수 없다는 사무치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모든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이제 그만하자. 이 지독한 고통을 끝내자. 그리고 마침내, 하얀 알약들을 가득 쥔 손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오랜 투병으로 쇠약해진 팔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정신은 죽음을 갈망했지만, 살아남으려는 육체는 본능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팔이 의지와 상관없이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렸다.
바로 그때였다. 침대 옆 수액 펌프에서 '삐빅- 삐빅-' 하는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수액이 다 떨어졌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알람이었다. 그녀의 숭고하고도 비참한 결심을 깨뜨리는, 무심하고도 절대적인 불협화음이 되어 심장을 때렸다.
그 순간, 온몸의 힘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하얀 알약들이 하얀 눈처럼, 혹은 흩날리는 뼛가루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죽는 것마저 실패했다.
장미는 흩어진 약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울리는 기계음을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참지 않았다. 참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끅끅거리며,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그것은 절망의 울음이기도 했지만, 죽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자신의 처절한 생명에 대한 서러운 통곡이기도 했다. 가장 깊은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