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제10장. 어둠 속의 사유
요란했던 통곡이 잦아들고, 새벽의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핏기 없는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장미는 흩어진 약들을 앞에 둔 채, 탈진한 몸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소금기 어린 껍질처럼 뻣뻣했고, 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간 듯 뼛속까지 시렸다. 멈추지 않고 울리던 수액 펌프의 기계음만이, 텅 빈 공간 속에서 그녀의 실패한 죽음을 무심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그때, 경고음을 듣고 달려온 동생 유진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하얀 알약들과, 영혼의 모든 빛이 꺼져버린 텅 빈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간호사로서 수없이 마주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언니의 발밑에 흩어져 있었다. 전문가의 냉철함은 무너져 내렸고, 동생으로서의 원초적인 공포가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명을 지르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다가와, 차갑게 식어버린 언니의 몸을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약들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주워 담았다. 마치 깨져버린 언니의 마음 조각을 쓸어 담는 듯한 그 신중한 침묵이, 그 참혹한 심정을 애써 누르는 손끝의 떨림이,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아프게 장미의 마음에 박혔다.
유진은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곁에 있었다. 동이 틀 무렵, 잿빛 창문으로 희미한 여명이 스며들 때,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지쳐 잠든 동생의 거칠어진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간호사의 일이 고되어 생긴 굳은살의 감촉. 그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를 느끼는 순간, 아주 희미한 기억들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된 생생한 감각처럼 피어올랐다.
갓 태어난 지혜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솜털 사이에서 풍기던 달큼한 젖 내음과 세상의 모든 온기를 품은 듯한 무게감. 제 손가락을 운명처럼 꽉 쥐던 작고 부드러운 손의 악력. 민준과 처음 손을 잡았던 어느 겨울밤, 그의 차가운 손에서 느껴지던 서툴지만 따뜻한 떨림과 세상을 다 가진 듯 쿵쿵 뛰던 설렘. 햇살 좋은 오후, 스케치북 위로 투명하게 번져가던 물감의 기억과, 완벽한 색의 조화를 찾아냈을 때의 그 고요하고 충만한 희열.
그 찬란했던 삶의 조각들이,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죽음을 생각하자 역설적으로 삶이 보였다. 어젯밤, 내가 삼키려 했던 것은 단지 몇 알의 약이 아니었다. 이 모든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남겨질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의 부재를, 종이가 찢어지도록 눌러 그린 검은색 크레파스로 표현할 딸 지혜의 작은 등. 평생을 자식 걱정으로 등이 굽으셨을 부모님의 주름진 손. 그리고 지금 자신의 손을 잡고 잠든, 언니의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동생의 지친 눈빛. 민지와 민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묵묵히 지키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녀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 끝일까. 그것은 그들의 남은 삶에 내가 또 다른 슬픔과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가장 이기적인 행위가 아닐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는 잔인한 시작이었다.
잠에서 깬 유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었다.
“언니… 괜찮아?”
장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쉰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담아 말했다.
“…나, 이기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봤어.”
병마와 싸워 이기는 완벽한 승리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 독하고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배신과 외로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 장미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승리임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 받았던 배신과 다를 바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마지막이자 가장 완전한 배신이었다.
유진은 언니의 텅 비었던 눈에 아주 작은 빛이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어머니가 어제 가져왔지만 장미가 손도 대지 않았던, 차갑게 식어버린 죽을 데워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 그릇에서 아주 희미한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장미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입안으로 퍼지는 맛은 여전히 역한 쇠 맛이었지만, 그 쇠 맛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엄마의 손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을 삼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따뜻한 감각. 생명이 다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감각이었다.
살아내기 위한 첫 숟가락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쓰고도 위대한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