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후쿠시마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2호기와 3호기마저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검은 연기 기둥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TV 화면은 24시간 내내 절망적인 수치와 파국의 이미지를 쏟아냈다. ‘멜트다운’이라는, 인류의 오만이 빚어낸 가장 끔찍한 단어는 더 이상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 되어 수십만 명의 삶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진이 근무하는 원자력 안전위원회는 거대한 폭풍의 눈이 되었다. 백악관과 연결된 직통 라인은 쉴 새 없이 울렸고, 미 에너지부는 일본 정부를 지원할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 파견단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공기는 유리잔이 깨지기 직전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동료들은 커피잔을 든 채 모여 앉아, 위험성을 거론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누군가는 어린 자녀를, 다른 누군가는 노부모를 핑계로 참여를 고사했다. 그들의 불안은 합리적이었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옥의 한복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유진의 사무실 전화가 날카롭게 울렸다. 국장의 목소리였다.
"유진,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자네가 설계한 원자로 스트레스 테스트 모델링이 지금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나침반이 될 수 있어. 물론 강요는 아닐세.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유사 이래 가장 위험한 임무가 될 거야."
국장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이면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유진은 수화기를 든 채 통유리 창밖을 보았다. 회색 빌딩 숲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마치 후쿠시마의 죽음의 재에 오염된 것처럼 탁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첫 번째 본능은 ‘도피’였다.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것을 등지고 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아버지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저주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도망칠 기회가 아니었다. 이것은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유일한 기회였다.
후쿠시마는 25년 전 체르노빌의 끔찍한 데자뷔였다. 똑같이 폭발해버린 원자로, 진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정부, 그리고 그 거대한 시스템의 논리 아래 이름도 없이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 아버지의 침묵 속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의 조각이 바로 저곳, 지옥의 심장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왜 평생을 침묵해야만 했는지, 무엇이 한 인간의 영혼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갉아먹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그리고 문득, 그는 아들 데이비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맑게 웃는 아이. 만약 내가 여기서 도망친다면, 이 비극의 고리를 외면한다면, 언젠가 내 아들 역시 나와 똑같은 질문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침묵이 아들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듯, 자신의 외면이 아들에게 또 다른 부채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영웅심이나 사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이것은 가장 역설적인 형태의 도피이자,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대면이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바로 그 과거의 심장부로 뛰어드는 것. 유진은 자신의 운명이 거대한 비극의 궤도를 따라 순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가겠습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단하고 명료했다. 수화기 너머로 국장의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유진은 전화를 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 소리가 마치 지옥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그는 아버지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