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아버지의 서재는 언제나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의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고요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형태와 무게를 지닌 무엇, 이를테면 묵직한 안개와도 같아서, 방 안의 낡은 책 냄새와 희미한 잉크 냄새마저 질식시키는 듯했다. 그 침묵은 수많은 단어들이 뱉어지지 못한 채 썩어 문드러져 만들어낸 퇴적층이었고, 내뱉지 못한 고통들이 잉태한 유령이었다. 어린 유진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세상의 끝에 있는 미지의 심해와도 같았다. 문턱을 넘는 순간, 온몸이 보이지 않는 압력에 짓눌리는 듯한 그곳에서, 아버지의 침묵은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자 가장 무서운 괴물이었다.
아버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앓았다. 한때 단단했던 그의 몸은 가을날의 낙엽처럼 바싹 말라갔고, 밤이 되면 집의 모든 어둠을 끌어모은 듯한 지독한 기침 소리가 방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마치 몸 안의 생명을 조각내 뱉어내는 듯한 그 소리에 어린 유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숨죽여야 했다. 병원에서는 명확한 병명을 내놓지 못했다. ‘원인 불명의 면역 체계 손상’. 그 모호한 진단명은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가족의 삶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유진은 그날의 햇살을 기억한다. 눈부시게 쏟아지던 어느 일요일 오후, 낡은 글러브를 끼고 아버지와 함께하던 캐치볼.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던 야구공이 아버지의 글러브 앞에서 힘없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공을 줍는 대신, 텅 빈 눈으로 저 멀리, 세상의 끝이라도 되는 듯 아득한 곳을 응시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그의 옆모습 위로 드리운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죽음의 그림자를 어린 유진은 보았다. “아빠, 어디 아파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거칠어진 손으로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손길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 너머에는 닿을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었다.
유진의 모든 질문은 아버지의 침묵이라는 견고한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어디에 다녀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왜 그렇게 아파하는지. 아버지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그 주제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맹세라도 한 사람들처럼. 그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유진은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섬에 홀로 표류한 그는, 사무치는 소외감과 함께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분노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키워나갔다.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침묵을 지켰다.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유진의 손을 잡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였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입술에 귀를 기울였다. 제발, 단 한 마디라도. 하지만 결국 아무런 소리도 그의 귀에 닿지 않았고, 아버지는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끝내 전해지지 않은 그 마지막 말. 그것은 유진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졌다. 아버지는 유진에게 대답 대신,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거대한 질문 그 자체를 유산으로 남기고 떠났다. 그 침묵의 무게는 이제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