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헬리콥터가 육중한 동체를 덜컹거리며 고도를 낮추자, 유진은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숨을 삼켰다. 지난 며칠간 지겹도록 봐왔던 언론의 카메라는 이 거대한 재앙의 지극히 작은 편린만을 담아냈을 뿐이었다. 거대한 쓰나미가 무자비하게 할퀴고 간 해안선은 마치 신화 속 거인의 손톱에 긁힌 상처처럼 보였다. 바다로 흘러드는 뿌연 오염수의 경계가 선명했고, 텅 빈 마을과 도로 위에는 주인을 잃은 배들이 기괴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 상처의 끝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는 묵시록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
폭발로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난 원자로 건물은 거대한 짐승의 갈비뼈처럼 보였다. 홍수에 휩쓸려 장난감처럼 뒹구는 자동차와 컨테이너 박스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죽음처럼 내려앉은 잿빛 가루. 유진은 그것이 단순한 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죽음을 품은 방사성 낙진임을 알고 있었다.
헬리콥터가 착륙장에 내리자마자 귀를 찢는 굉음이 그를 덮쳤다. 정전된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임시로 연결된 수십 대의 비상 디젤 발전기가 내지르는 필사적인 절규였다. 그것은 상처 입은 거대한 강철 괴물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소리, 혹은 수백 개의 심장이 한꺼번에 터져버릴 듯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숨 막히는 방호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선 순간, 그는 또 다른 종류의 소음에 압도당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개미 군단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어떤 인간적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두꺼운 방호복과 마스크는 그들의 정체성과 표정, 나이와 성별을 모두 지워버렸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농담을 건네던 동료마저도, 하얀 옷과 고글 너머에서는 그저 익명의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가 되어, 마치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정해진 동선에 따라 묵묵히 움직일 뿐이었다. 방호화가 자갈과 잔해 위를 지나는 서걱거리는 소리,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마스크 안에서 증폭되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제외하면 현장은 무겁고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유진은 이 침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서재를 언제나 가득 채웠던, 수많은 말들을 삼킨 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 침묵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슬픔, 분노, 공포, 그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차마 소리가 되지 못하고 공기 중에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 혼돈과 절규로 가득해야 할 재앙의 현장을 지배하는 이 기이한 고요함. 유진은 이곳이 단순히 사고 현장이 아니라, 산 자들의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은, 25년의 시간을 거슬러 아버지의 고통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 또 다른 무덤의 입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름만 다를 뿐 이곳은 아버지의 영혼이 갇혔던 감옥과 똑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