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록자
2025년 8월: 공범의 침묵
여름의 끝자락, 지긋지긋하던 폭염은 한풀 꺾였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서늘한 해방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끈적한 불안감이 피부에 달라붙는 듯한 날들이었다. 거리는 휴가철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우리 집의 공기는 시베리아의 벌판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금리 인상 뉴스가 흘러나왔다. '사상 최대폭 인상', '영끌족의 비명 현실로'. 자극적인 자막들이 쉴 새 없이 화면을 뒤덮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아내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침묵은 끓어오르기 직전의 용암과 같았다.
"여보, 당신도 들었지? 우리 다음 달 대출 이자 얼마나 오르는지 알아? 이제 외식은 꿈도 못 꿀 것 같아. 당분간 당신 용돈도 반으로 줄여야겠어."
아내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빗속을 위태롭게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유독 배달 기사들이 바빠 보이네. 저 사람들은 이 빗속에서 하루 종일 길 위에서 지낼 텐데…"
그것은 연민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기록하던 세상의 붕괴가 내 집 창밖에서도 펼쳐지고 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얼음송곳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혔다.
"제발 그만 좀 해! 당신이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야? 당장 우리 집이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뜬구름 잡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당신이 쓰는 그 잘난 기록이 대출 이자 한 푼이라도 내줘? 현실을 좀 보란 말이야!"
옆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아들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 눈에는 경멸과 동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빠, 그냥 포기하세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예요.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거고, 약한 사람은 도태되는 거고. 아빠가 그렇게 글 쓴다고 바뀌는 거 하나도 없잖아요. 제발 우리까지 힘 빠지게 하지 마세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가족에게조차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거대한 불안의 파도는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좀먹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켜고, 하얀 화면 위에 제목을 썼다. '무너지는 사다리 위에서'.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줄 알았던 깊은 새벽이었다. 뒤척이다 거실로 나온 나는 소파에 아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내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아내는 내가 썼던 글들—'사이렌을 외면하는 사회', '미래를 위한 추도문' 같은 제목의 글들을 읽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모니터 불빛에 비친 아내의 얼굴은 낮의 그 차가운 분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해버린 사람의 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기척에 아내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제 알겠어. 이 글들... 다 우리 이야기였네. 내가 매일 가계부를 보며 느끼는 불안, 우리 아들이 취직 못 할까 봐 느끼는 공포... 다 여기 있었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옆에 앉았다. 아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알아서 뭐 해? 안다고 해서 다음 달 대출 이자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당신 말이 다 맞아서... 그래서 더 절망스러워. 우린 그냥 이 배 위에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날 이후 아내는 더 이상 내 글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사이에는 더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 그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절의 침묵이 아니라, 같은 절망을 공유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공범의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