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 (확장판) - Part13

마지막 기록자

by sarihana

2부: 아들의 기록


2025년 1월: 숫자의 폭력


새벽 3시 14분. 모니터의 차가운 빛이 어두운 방 안의 먼지들을 허공에 드러냈다. 마우스 커서를 '새로고침' 아이콘 위에 올린 채 10초, 20초, 시간을 셌다. 심장이 불안하게 발뒤꿈치를 찧었다. 그리고 마침내, 읽지 않은 메일 숫자가 '1'로 바뀌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최종 결과 안내]


결과는 늘 최종이었다. 과정 따위는 없었다. 클릭. 스크롤. 그리고 익숙한 문장이 눈에 박혔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역량. 내 역량은 토익 950점, 컴퓨터활용능력 1급, 한국사 1급, 이름도 어려운 데이터 분석 자격증 같은 숫자로 존재했다. 지난 4년간 도서관과 스터디 카페에 내 청춘을 갈아 넣어 만든 숫자들. 하지만 그 숫자들은 늘 ‘불구하고’라는 네 글자 앞에서 힘없이 분해되었다.


메일함에는 이미 56개의 같은 문장들이 시체처럼 쌓여 있었다. 오늘로 57번째 사망 선고였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SNS를 켜자, 얼마 전 대기업에 합격한 동기의 포스팅이 보였다. 부모님이 사주셨다는 번쩍이는 새 차 사진 아래로 ‘#취뽀 #효도 #첫차’ 같은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다른 친구는 벌써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며 웨딩홀 사진을 올렸다. 그들의 세상은 나와 다른 시간대에서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키보드 위에서 조용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숫자의 폭력은 보이지 않는 멍을 남긴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여자친구였다.


‘아직 안 자? 결과 나온 거 있어?’


‘아니, 그냥 기다리는 중.’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뻣뻣했다. 거짓말은 점차 정교해졌다.


‘너무 걱정 마. 넌 잘될 거야. 우리 내년에는 꼭 같이 살자. 작은 집이라도 좋으니까.’


그녀의 따뜻한 메시지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부동산 앱을 켰다. 서울의 전세가, 월세가… 내 존재를 비웃는 듯한 숫자들의 향연. 내가 배달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는 보증금은커녕 월세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의 희망이 나에게는 가장 무거운 절망이었다. 나는 억지로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휴대폰을 뒤집어 버렸다.


며칠 뒤, 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와 이력서를 다시 써보자고 했다. 아버지의 선의 가득한 눈빛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속에서 치밀었다. 아버지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달랐다. 아버지가 말하는 '경험'과 '진심'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낡은 유물이었다.


"됐어, 아빠.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아빠가 해주는 건 옛날 방식이라 어차피 도움도 안 될 것 같아. 그냥… 그럴 돈 있으면 학원비나 더 보태주면 안 돼?"


상처받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아버지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보다, 우리의 관계를 차가운 거래로 만드는 것이 차라리 견디기 쉬웠다.


그날 밤, 나는 배달 플랫폼 라이더 모집 공고를 끝까지 읽었다. ‘노력한 만큼 버는 정직한 땀.’ 웃기지도 않는 문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최소한 이 일은 내 역량을 숫자로 재단하고 ‘불구하고’라는 말로 모욕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음 날, 나는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헬멧을 쓰고 배달 가방을 메는 내 모습을 거울로 봤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지웠다. 집을 나서는 나를 본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첫 배달 콜이 울렸다. 나는 시동을 걸었다. 1월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대신, 더 깊은 세상의 밑바닥으로, 숫자가 지배하는 또 다른 전쟁터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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