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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멘린나, 상처 위에 피어난 평화

시간이 머무는 섬

by sarihana

헬싱키 마켓 광장에서 페리에 오르는 순간, 짧은 여행이 시작된다. 불과 15분. 멀어지는 대성당의 하얀 돔을 뒤로하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다 보면, 눈앞에 거대한 돌의 섬, 수오멘린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섬에 첫발을 내딛는 일은 낡은 역사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발밑의 거친 돌길 위에는 스웨덴 병사와 러시아 군인의 발자취가 겹쳐 있고, 바닷바람에는 오래된 화약 냄새가 스며든 듯하다.


그러나 섬의 오늘은 다르다. 낡은 대포 옆으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견고한 성벽은 연인들의 등을 기대주는 벤치가 되었다. 방어용 언덕 위에서는 가족들이 담요를 펴고 평화로운 피크닉을 즐긴다. 전쟁의 흔적과 오늘의 웃음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풍경이 신기할 따름이다.


섬 안쪽으로 들어서면 파스텔 톤의 목조 주택이 이어진다. 창가의 작은 화분과 바람에 흔들리는 빨랫줄은, 이곳이 죽은 박물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는 마을임을 보여준다.


수오멘린나는 과거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를 토대로 오늘의 평화를 피워냈다. 돌아오는 페리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저 섬과 같을지 모른다고. 지울 수 없는 흔적 위에서 우리는 오늘의 웃음을 피우고 내일의 평화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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