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감응자는 언제나 주변의 미세한 진동에 반응하는 존재다.
말투의 높낮이, 표정의 그늘, 단어의 배열 순서, 어깨의 굳은 정도까지도 감지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대부분 감정이라는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감응자는 피곤하다.
구조보다 감정이 먼저 들어오고, 감정보다 본질이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소모된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질문을 바꾸었다.
“이 관계는 감정의 문제인가? 아니면 구조의 문제인가?”
1. 감정 없는 협업, 가능한가?
나는 어떤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전혀 맞지 않지만,
업무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협업 대상일 때가 있었다.
그 사람은 무례했고, 어색했고, 조율 능력이 떨어졌지만
현실적으로 교체가 불가능했고, 상부 보고를 통한 분리는 차단되어 있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한다.
하나는 억지로 친한 척을 하며 소진되는 것,
다른 하나는 감정의 골을 그대로 드러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
하지만 나는 세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감정을 걷어내고, 구조와 기능만 남긴 협업.
그 사람의 말에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 사람의 결정에 정답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이 가진 기능만을 분석하고 활용했다.
그는 나에게 기분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입력값'**이 되었다.
나는 거기서 감정을 덜어냈고, 기능만 추출했다.
2. 수준 차이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 기술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수준 차가 너무 클 때,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 마찰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럴 땐 감응자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개선 시도를 하지 마라.
감응자의 본능이지만, 생존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기능의 단위로 역할을 쪼개라.
그 사람은 “내 시스템 외부의 느린 기계”라고 선언하라.
그 존재를 개선하려 하지 않고, 단지 **'우회 회로'**를 설계하면 된다.
“그는 고장난 기계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고장 난 기계를 지나갈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다.”
3. 감정 소진을 막는 생존적 위선
감정을 걷어낸다는 말은 무표정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전략이다.
감응자는 자기 감정을 일부러 감추고, 외부에 노출하지 않아야
핵심 회로를 보호할 수 있다.
내 감정은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은 오직 나의 중심을 세우는 데만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방식에 이름을 붙인다.
‘생존적 위선’
그건 거짓이 아니라, 감응자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기술이다.
그 누구도 내 감정을 허투루 뺏어가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마지막 선언
이제 나는 더 이상 모든 관계에서 정직하게 소모되지 않는다.
감정과 구조를 분리해서 본다.
나를 소모시키는 감정은 외부 회로로 빼고,
내가 보호해야 할 것은 오직 내 중심, 내 사유, 내 리듬이다.
감응자는 누군가를 바꾸는 자가 아니다.
흐름을 조율하고, 구조를 바꾸는 자다.
감정을 걷어내고 구조만 남겨야
비로소 진짜 감정이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