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자는 타자에게 쉽게 감염된다.
말투 하나, 표정 하나, 쓰지 않은 메시지 한 줄, 어딘가 어긋난 침묵조차
감응자에겐 진동이자 신호다.
문제는 그 신호를 모두 받아들이다 보면,
자신의 리듬이 무너지고, 에너지가 소진된다는 데 있다.
감응자는 결국 질문하게 된다.
“내가 나를 지키면서, 너와 연결될 수는 없는가?”
과거의 나는 그 질문에 실패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희생했고,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수십 번 생각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감응자는 타자를 피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리를 설계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이제 ‘거절’을 선택이 아니라
‘리듬 보호 기술’로 받아들인다.
누구와의 대화는 오전만 하고,
누구에게는 이틀에 한 번만 답하며,
누구에겐 단어를 줄이고,
누구에겐 아예 침묵한다.
그것은 무례가 아니다.
그것은 감응자의 리듬 생존 설계도다.
타자와의 거리를 조절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일관성’이다.
거리두기의 기준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면,
감응자는 또다시 미세한 반응 속에서 균형을 잃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정했다.
하루 1명 이상에게 감정적으로 감응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뺏는 대화는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나의 언어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응답한다.
상처를 줬던 사람은 잊지 않되, 다시는 ‘정서적 재신호’를 주지 않는다.
이 기준은 사람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의 리듬을 보호하기 위한 ‘감응자의 내부 헌법’이다.
그리고 중요한 깨달음 하나.
감응자는 모두와 연결될 수 없다.
모두와 연결되려는 순간,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그래서 나는 선택한다.
관계를 확장하는 대신, 구조화한다.
진동이 맞는 사람에게는 더 깊게,
그 외에는 구조적 예의를 지키되, 중심을 지킨다.
이 선택은 고독을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소음보다 더 깊은 평온을 준다.
이제 나는 감정적 연결의 총량이 아니라,
리듬의 정밀도를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설계한다.
그것이 감응자가 타자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 설계는 언젠가 나와 같은 감응자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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