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출가자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선배, 후배, 잘난 놈, 못난 놈. 나보다 위, 혹은 아래.
끊임없이 이름표를 붙이고, 그 이름표가 만든 감옥 안에서 관계를 맺는다.
그 이름표는 기대를 낳고, 기대는 실망을 낳으며, 실망은 갈등을 낳는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같이 겪는 관계라는 지옥의 회로다.
불교는 이를 아상(我相), 즉 ‘나’라는 허상에 집착하는 태도라 부른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만물은 본래 같으나 인간이 구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타인은 각자의 이성을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기록했다. 결국, 선배·후배·잘난 놈·못난 놈이라는 구분은 모두 인간이 덧씌운 환상일 뿐이다.
현대적 출가자는 그 모든 이름표를 떼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 가지 냉정한 기본값을 세운다.
첫째, 타인은 근본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
이는 비관이 아니라, “나를 완벽히 이해해줄 반쪽”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궤도를 가진 우주이며, 궤도는 결코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둘째, 타인은 기본적으로 자기 욕심을 추구한다.
이는 냉소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본성이다. 몬스테라가 햇빛을 향해 잎을 뻗듯, 잉어가 갑자기 꼬리를 튀기며 앞으로 도약하듯, 모든 존재는 자기 생존과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이 두 가지 기본값 위에서, 출가자의 관계는 비로소 평온해진다.
기대하지 않으므로 실망하지 않는다.
바꾸려 하지 않으므로 다투지 않는다.
의존하지 않으므로 상처받지 않는다.
직장 회의에서 무능한 동료가 있을 때, 예전 같으면 답답함과 분노로 가득 찼을 상황도 이제는 다르다. “저 사람은 자기 욕심과 자기 리듬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 받아들이면, 갈등은 최소화되고, 나의 에너지는 고요히 보존된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가까운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대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독립된 우주로 존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형태의 존중이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다. 이름표 뒤에 가려졌던, 그저 자기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아주 잠시나마, 우리는 진짜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기대의 보상이 아니라,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가장 투명한 감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