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7-스페어

박 대리

by 송사리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가족 한 명이 아프면 온 식구가 고생해야 한다는 걸 여실히 깨달은 지난 한 달이었다.


약 5주 전, 어머니의 수술날에도 연차 못 쓰고 보호자로 동석했던 일상을 기록했다. 명백한 찡찡거림이면서도 장남으로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멘탈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나고 보니 이유는 별 것 없다. 그 주 토요일에 엄마 곁에 지키고 있을 가족이 없었고, 눈을 뜨니 병원으로 와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 지난여름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모들과 자녀들은 쾌유를 위해 물심양면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음가짐이야 세 달이 지나도 그대로지만, 마음가짐만으로 세상일을 다 해결할 수는 없었다. 각자 생업과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일들이 생겼고, 수술 날짜가 갑자기 바뀐 상황을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들이니까, 당연히 입원하기 전날인 토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오전까지 엄마 곁에 있는 것은 당연히 할 도리였다. 다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며칠의 여유를 잠시 보상받고 싶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필요도 있고. 그런데 이틀 만에 눈을 뜨자마자 호출을 받으니 서러움이 확 몰려왔다.


678cfc328d0e47f3e8920eae38716aa8e505eae1 저녁 먹고 잠시 산책하며 바라본 풍경. 벌써 한 달 전이다.

물론 당연히 할 도리다. 누가 봐도 미혼에 근태가 자유로운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럼에도 나는 '스페어' 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잡아버렸다. 아쉬울 때면 언제든 불러서 요청을 하고, 어쩌다 한 번 거절하면 나쁜 사람이 되어있는 그런 신세. 올해 내내 회사 생활도 처치곤란한 일을 급히 떠안아야 할 때가 많았고(생각보다 중요한 일정을 급하게 공지하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 도움이 되고 싶어 토 안 달고 해결하려 했더니, 궂은 일이 당연하게 내 몫이 되어버린 생각들까지 다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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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나 만만한 존재로 보이는 걸까. 인스타그램 돋보기 버튼 눌러서 봤던 짤이 떠올랐다. 호구로 여겨지는 드라마 <미생>의 박 대리가 나 같다는 얘기지. 호구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한테 아쉬운 표정으로 부탁하는 사람들이 진짜 내게 미안해서 그런 표정 짓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않나.


서러움과 서운함 중간쯤의 감정을 결국 풀지 못한 채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각종 링거와 배액관을 꽂은 엄마한테도 입이 대빨 튀어나온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엄마도 당연히 알아차렸고, 주말을 두 번 연속 자신에게 쓰게 된 점에 대해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엄마 간병을 맡는 게 싫어서 우중충한 표정을 지은 건 아니지만, 엄마가 아프게 된 상황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당장 해결될 수 없는 채로 앞으로 쭉 가져가야 할 숙제기도 하고.


이때부터 멘탈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나름 발버둥을 치고는 있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자꾸 발목이 붙잡히니까. 여기에 글을 쓰는 것을 비롯해 나름 뭐라도 해보겠다고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누가 부르면 난 또 하던 걸 멈추고 매달려야 하니까.


7e08ebd37f5c5465c7ede3c48286074fb9f51af8 감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임에도, 술에 의지하며 늦가을을 보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그저 회피하고 싶었다. 주변에 멘탈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먼저 알렸다. 이게 나중에 약점이 될 수 있는 걸 알지만, 지금 너무 힘들어서. 흔들린 내 모습을 합리화하려는 수작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주변의 도움이 절박했다. 사고도 많이 치기도 했는데, 많은 분들이 아량을 베풀어 준 덕분에 아무 일 없었던 척 뻔뻔하게 굴고 있다. 그래도 발제는 안 밀리고 다 냈다.


독감에 걸린 덕분에(물론 일은 평소처럼 했다) 간만에 이틀 연속 술을 안 먹고 맨 정신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올해도 벌써 2주 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저씨를 넘어 중장년을 향해 가고 있다니.


올해 나에겐 뭐가 남았을까. 지독하게 삼재를 겪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뭔가 주어진 상황에서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부단히 움직였다고 자부는 하는데, 그 이유가 주변에서 욕먹기 싫어서가 가장 컸던 것 같아 슬프다. 나도 이제 내가 주변을 둘러싼 환경을 주도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주변 상황에 못 이겨 여기저기 끌려다니고만 있다.


앞으로 이런 굴레에 더 얽매이며 살게 될 것 같다. 적지 않은 나이인 만큼 어떤 시련에도 잘 이겨내는 모습을 보이고픈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여전히 붙잡히지 않는 멘탈,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들.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스페어는 넘어서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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