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딱 10년 전 인상 깊었던 예능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단연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이다. 그 시절 우리는 '미생' 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비록 일류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지만, 누구나 완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축구 미생들의 완생 도전. 절망의 끝자락에 선 20대 청춘들의 희망찬 도전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 희망을 내건 <청춘FC>는 참 따뜻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지원자가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쳐 20여명만 청춘FC 유니폼을 입게 됐지만, 프로그램은 고배를 마신 도전자도 조명했다. 남성들 사이에서 근성으로 밀어붙여 안정환의 박수를 받은 여성 지원자 심연희, 백혈병을 극복하고 그라운드에 선 방진규, 실패한 축구 인생에 자조하며 술로 방황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은 천국회 등등.
합격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각자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사연이 있었고, 시청자들은 그들의 청춘에 누구보다 열띠게 박수를 보냈다. 부상에 좌절하는 출연자를 보면 청춘의 시련에 함께 눈물 흘렸고, 나태해진 청춘에게 가하는 일침은 마치 숙취에 허덕여 자소서를 대충 쓰는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누구보다 몰입했던 이유다.
10년이 지나 살펴본 유튜브 <5분 동기부여 안정환 쓴소리> 영상 댓글은 그야말로 '곱창났다'. 이제 우리는 <청춘FC>조차도 잘 연출된 하나의 드라마라는 것을 안다. 출연진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현실을 수긍하고, 지도자 등으로 진로를 바꿨다. 완생 도전기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위치를 일깨우게 한 나침반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이제 예능 프로그램은 퇴출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꺼낸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시작은 2022년 JTBC <최강야구>. 승률 7할을 밑돌면 프로그램 폐지라는 룰을 내걸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은퇴 야구선수들이 다시 경기에 임하는데 있어,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때만 해도 재밌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실수해서 승률이 떨어지면 방송 스태프를 포함해 230명의 밥줄이 끊긴다는 김성근 감독의 말에 장난꾸러기 정근우도 얼어붙는다. 다시 잡은 방망이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휘두를 수밖에 없다.
분명 같은 프로그램인데 하차라는 단어를 몰래카메라 수단으로 사용하는 순간, 나는 <최강야구>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장난으로 던진 돌맹이에 몇몇 개구리들은 심각하게 놀랐고, 또 눈물을 흘렀다. 목숨이란 단어를 직접 쓰면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는데, 저러고 싶을까. 폐지, 하차라는 단어가 철저하게 시청률이라는 수단이란 걸 방증한다고 본다 나는.
그리고 최근 장안의 화제인 <신인감독 김연경>. '배구계 숨은 보석을 찾아 배구계 판도를 흔드는 제8구단이 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누구보다도 방출과 해체라는 단어를 가장 화두에 내세운다.
<신인감독 김연경> 역시 참가 희망자들이 모여 경기에 뛰는 일종의 오디션을 거치는데, TV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덕분에 비교적 배구 꽤나 오래 본 나도 잘 모르겠는 선수가 몇 명 있다. 어쩌다가 배구 생활의 끝자락에 왔는지 개개인의 스토리를 조명하기도 전에, 출연자들을 폐지 위기에 몰아넣는다. 다시 말하지만 애초에 프로 입성에 실패하거나 도중에 방출된 이들이다. 무슨 죄가 있나.(오디션을 보긴 했지만 배구 실력 외에 외적 요소, 캐릭터 보유 여부에도 섭외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다 보니 분명 화제의 프로그램에 올라있고, 나도 스포츠 예능을 좋아하는데, 점점 <신인감독 김연경>을 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졌나 이런 생각이 금방 들었다. 도파민을 자꾸 불어넣고 넣어 미생들에게도 낙제점을 부여하고, 최선을 강요하는 것만 같은.
물론 누구보다 승부욕이 넘치고, 본인이 납득할 수준까지 열심히 매진한 덕분에 김연경은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랐다. 근데 축구 전설 차범근도 수원삼성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 고난도 발리슛을 선보이면서 "이게 안 돼?"라고 의아해했다는 일화가 내려오지 않나. 집중력이 떨어져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당연히 혼나야 한다. 애초에 실력이 안 돼 '제8구단'에 출연한 선수에게 "너 방출되고 싶어?"라고 꾸짖는 건 내가 속이 상했다.
나이를 먹어보니 이젠 알게 됐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때론 재능과 운이, 노력이라는 고리타분한 요소를 훨씬 능가하기도 한다는 걸. 그걸 혼나고, 무엇보다 자존감 극도로 무너지면서 배울 필요가 있을까. 이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물론 출연료를 받는다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언럭키' 인쿠시 여기 하나 있다. 매일매일 올리는 기사 발제로 내 퍼포먼스를 평가받고, 아무리 개같이 돌아다녀도 기사가 약하면, "신문은 그럼 누가 만들라고?"라는 호통을 듣는 신문사 빌런ㅠ
지난주 금요일은 좀 꽁한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부장한테 혼났기 때문. 종일 인천 송도에서 비보도 전제의 공장 투어를 해야해 기사 쓸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 앞서 올린 기사 중 출고되지 않는 게 있었고, 새롭게 파악한 내용이 있어 기사를 다시 작성하고 발제 보고를 했다. 송도 출발 전 다 작성해서 올렸고.
하지만 부장은 그건 기존 발제를 보완한 거지, 1일 1발제라는 우리 회사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니냐고(분명 부드럽게 말했는데 글로 쓰니 딱딱해 보이네..ㅎ). 내가 송도를 다녀와야 하는 상황을 부장이 모르고 있었고, 나도 당연히 선배들이 얘기했을 거라고(선배들이 다녀오라고 했으므로) 생각하면서 발생한 오해임이 분명했다. 또 휴가자가 있는 상황이었는데, 발제 갯수가 모자라면 부서 자체 평가가 깎이니까. 더 경각심을 일깨웠을 테다. 우리는 개개인이면서 팀으로서 또 평가를 매일매일 받으니까.
이해하면서도 금요일 퇴근하고 나서 좀 많이 속이 상했다. 발제를 아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 왜냐면 이번 주 엄마 병간호를 하느라 온전히 기사에 매진하기 어려운 처지다. 본래 금요일 수술이었는데, 월요일 수술로 갑자기 바뀌면서 보호자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들인 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연차를 써야 마땅하지만, 한참 전에 이 기간에 휴가를 쓰기로 한 선배가 있는 상황. 두 명이 빠지면 업무 차질이 심각해진다. 결국 내가 병원에서 엄마를 돌보면서 여력 되는 선에서 기사를 쓰겠다고 정리를 했다. 한참 전에 휴가 계획 세웠는데 선배가 혹시 마음 쓸까봐 저렇게 정리한 이후로는 엄마 수술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엄마 아픈 줄 모르는 회사 선배가 훨씬 많다.(근데 공개적인 글을 올리는 나..)
딴에는 조직에 피해 안 주려고 발버둥치는데, (물론 내 잘못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다 보니 듣게 된 한소리는 김연경의 호통처럼 느껴졌다. 잔상이 남았는지 어제 입원하고 나서도 보호자 침대에 누워 노트북만 들여다봤고, 엄마 수술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 노트북 화면을 힐끔힐끔 살펴봤다.
"어머니 계신데 너 노트북 켜서 일하고 계심 더 마음 아프실듯..정 급하거 있음 내가 말할게.."
마음 급하게 메일함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고 있던 찰나, 선배 카톡을 보고 그만 하던 일을 멈췄다. 엄마가 인생에 있어 누구보다 큰 수술을 앞뒀는데, 보호자로 온 아들에게 일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욕먹기 싫어서, 눈치 보이기 싫어서, 내 가족을 등 뒤로 하면서까지 일할 이유는 없었다. 한 시간이라도 엄마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리 말 걸, 저리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엄마 카톡 '읽씹'이 주특기인데.
엄마가 수술에 들어가자 기사를 또 기계처럼 찍어내다가, "그만하라고 했잖아.."라는 선배 카톡에 다시 멈췄다. 내가 기사를 더 치는 게 조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엄마를 기다리며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곱씹어봤다. 나도 이 전쟁터에서 벼랑 끝에 내몰렸다는 위기감이 가장 커보였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일하지만, 3세트 25점짜리 경기에서 한 점 내줄 때마다 호통과 "마이 폴트" "쏘리"가 오가는 배구판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누적되니 또다시 굉장히 많이 위축됐다. 송도 다녀오겠다고 직접 말하면 되는 걸 우물쭈물 하다가 일을 키우는 것처럼.
핑계는 당연히 있다. 배구도 6명이 다 공격하려고 하면 탈 난다. 우리 조직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한 걸음 뒤에서 언제 어디서 날라올지 모르는 상대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름 몸빵으로 조직에 기여를 하려고 하고는 있다. 하려고 하고는. 돌아가면서 스파이크를 날려야 하는데, 이건 내 능력 밖의 문제다. 근데 내 능력을 향한 손가락질도 많이 당한다. 회사도 더이상 나를 미생이라고 동정심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미생을 원하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엄마 수술이라는 중차대한 날에, 엄마를 더 걱정하게 만든 불효자가 된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당장 쉽진 않겠지만 조금 풀어야 할 매듭이 보인다. 은근 에너지를 많이 썼지만, 오늘의 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또 끄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