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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Oct 14. 2019

2019년 10월 '할머니'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에 딛고 쓰기

[이미지 설명] 천안에서 엄마가 어릴때 살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집 어제 모습이다. 엄마가 이 집을 떠난지 50년이 훌쩍 넘었고 할머니도 20년도 더 전에 이 집을 떠났다. 엄마가 돌을 줍고 숨겨놓았다는 뒷 뜰의 드넓은 밭은 축사가 되어있다.




글을 쓰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쓰는 것이 처절하다고 느껴질 때 보다 더 자주 떠오른 생각이다. 니체도 젊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아픈 와중에 철학하고 글을 썼다는데 반복적인 삶에 지쳐 앉아 투정만 부리기에는 너무 어리석다. 멈추고 일단 쓴다. 무슨 글이던지 써서 근육을 만들어보자는 초심이 벌써 아득해지지만 얼마 전 여름부터였다. 삶 속에 글쓰기 시간을 안정화시키기가 이렇게 어렵고 간절할 줄이야 고되지만 날 어지럽히는 온갖 잡념도 멈추고 다시 쓴다.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감정의 쓰레기통 같은 글은 쓰지 말자며 스스로 검열하고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글감들로 산만함을 느끼다가 아래 문장에 마음을 딛고 쓴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버지니아 울프


지금의 감정과 생각을 오래 간직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글로 남기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쓴다. 사람이던 어떤 사건이던 생각보다 평생 기억하기 쉽다는 의견이 요즘 들어 나를 의심한다. 잊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머릿속 꼿꼿하게 기록해 둔 사건은 사실과 다른 지점들이 발견되고 왜곡된다. 어느 노랫말처럼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9월 한 달은 말 그대로 '번 아웃', 감정과 체력 소진의 가을이었다. 살랑거리는 가을을 위해 사라지는 여름의 심술로 해두자. 다시 더웠고 다시 격한 감정을 북돋아 충전시켰고 호흡을 옭아매 거칠게 만드는 순간들이 잦았다.


가족이 아팠고 그 아픈 가족을 돌보러 다니는 가족이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한글날 새벽,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손주. 내 이름이 적힌 조문 소식을 문자로 새벽 4시에 받았다. 엄마가 보낸 문자이다.


어렴풋이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왜 남들은 둘이나 있는 할아버지가 내게는 없을 수 있을까, 할머니가 할아버지면 날 더 예뻐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뒤늦게 태어나서 가지지 못한 듯한 느낌이었다. 삼촌만 있는 나와 달리 이모가 많은 엄마가 부러웠고,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와 달리 왜소한 할머니의 등짝에 딱 붙어 느꼈던 온기가 기억난다. 아마도 엄마가 부족한 젓으로부터 날 떼어놓았고, 기억이 날 정도로 꼬마인 난 할머니 등짝에서 오산 시장에 구경을 갔었다. -수유를 3개월만 하고 복직한 날 생각하면 엄마가 내게 젓을 부족하게 물린 것도 아니다.- 이 기억 또한 검증이 안된다. 할머니에게 묻고 싶었는데 만났을 때는 너무 늦은 걸 알았다. 사실 검증이 필요 없다. 할머니와 나 오롯이 둘만 즐겁기 위해서 간 그 시장의 풍경과 할머니 목소리를 얇은 할머니 등짝을 통해 울려 듣는 내가 즐겁다. 그렇게 저장되어있는 것이 소중하다. 나를 업자마자 할머니는 늘 밥 먹었냐고 물었고, 난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태정이, 밥 먹었어?"


할머니.


아기를 낳고 부기도 안 빠져서 바지를 입지 못해 겨자색 여름 면 원피스를 입고 만났는데 아기를 낳고 더 예뻐졌다며 정말 눈에 하트를 띄우고 말하던 분. 지방 회사로 내려가서 신랑과 외식과 야식을 즐겨하다가 살이 과하게 쪄서 만났는데도 얼굴이 반쪽이라고 말하던 분. 진심으로 나를 예뻐하는 눈을 난 출산 후 36살이 되어서 알아봤다.


엄마는 계속 호스피스 병동에 못 오게 했다.

어쩌면 이번 여름 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부터 거세게 못 만나게 했다. 만나러 같이 가자는 말에 번번이 괜히 화를 내셨다. 아기랑 있는 서울에서 가기에 할머니가 계신 오산까지 차편도 안 좋고 멀었지만, 얼마 전 이동한 수원 호스피스 병동은 아기가 올 곳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셨다. 점점 더 영원히 할머니를 못 볼 것 같은 불안함으로 지난 주말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내 아기를 봤다. 갓난아기 때 보고 몇 번 못 봤지만 63빌딩도 같이 구경하고, 노량진 수산물 시장 가서 밥도 같이 먹고 기억을 하나도 못한다는 엄마의 말과는 다르게 다 기억하는 눈치였다. 아니 다 기억한다. 병동에 누워있었지만 많이 컸다고 세세하게 아기를 살펴봤다.  


장례식장에도 할머니는 없다.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말이 둥둥 떠다니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전달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말을 해준다면 그 표정과 함께 계속 내 머릿속에 저장하여 살려 두어야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못 보면 대면할 길은 영원히 없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글날 아침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과 주변 국화 장식들을 뚫어져라 보며 할머니를 찾았다. 사실 그간 사회생활하며 숱한 조문의 경험은 거의 의례적으로 낯선 영정사진에 인사를 드리고 슬픔에 잠긴 지인을 위로했다. 가족의 죽음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궁금했다. 우리 할머니가 영정사진 뒤에 있는지 말이다. 국화 더미를 한참 본다. 할머니는 거기 없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덧없이 다른 곳을 바라본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할머니가 여기 있지만 이미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4년 전 오빠 결혼식 때 찍은 스마트폰 사진을 확대한 것이란다. 아흔인 지금의 모습과 참 다르게 화장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이십 년은 젊어 보이게 곱게 계셨다. 젊을 때 농사일을 해서 그런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주름이 많은 할머니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키 크고 통통한 엄마와 왜소한 할머니가 많이 안 닮았다는 생각이 늘 있었는데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가 새삼스레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호스피스 병동에 가면서 할머니가 기억을 다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정말 그렇게 되었지만 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랑한다고 한 번도 못한 것도 이번에 꼭 해야지 마음을 다지고 작정하고 내뱉었다. 극도로 왜소해진 할머니 모습에 눈물을 삼키고 있는 나를 다독이며 말을 끄집어 입 밖으로 세웠다. 눈으로 못 나간 물은 코로 줄줄 흐르고 치솓는 감정을 눌러 이 말은 꼭 하고 돌아가리라.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에 다 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할머니.


다 기억하셨다. 눈물을 흘리셨고 난 그제야 안도했다.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그 고마움들, 할머니 기도로 유학길을 무사히 마치고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는 것에 전전긍긍 걱정해 준 그 모든 고마움들을 다 길게 말하지 못했지만 전달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큰 위로를 받았다.


"왜 왔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찡그리며 말도 하루에 몇 마디 못 한다는 할머니가 호스피스 병동 침대에서 연발한 말이다. 그 질문들에 할머니 보려고 왔다고 대답을 반복했다. 할머니 보고 싶어 왔지. 할머니 봐야지. 할머니 보려고 왔지. 할머니가 듣고 싶은 말인가 싶어 계속 말했다.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 할머니 나 봐야지. 할머니.

 

늦어버렸다.


아침 8시 발인인데 4시에 서울 집에서 나와 8시까지 오산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아기와 신랑을 두고 나 혼자 지하철 급행을 타고 가려고 스마트폰으로 검색까지 하며 시간 내 넉넉하게 용산역에 도착했는데 신창행 급행 플랫폼이 완행과 다른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서울 촌년'인 내가 너무 싫어 좌절한 순간이었다.


급행을 놓치고 완행으로 1호선을 타고 가다가 스크린도어 고장은 난생처음 겪었다. 지하철 1호선의 쉰 땀 냄새, 아침까지 마신듯한 술 냄새 등 승객들의 진한 체취들로 멀미가 온 건지 과호흡은 분명 아니었는데 급성 장염이 온 건지 가다가 너무 울렁거려서 중간에 내려 화장실을 찾아 역 밖으로 나갔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다시 탈 지경이었다.


걸어서 회사를 다니는 지방에 쭉 살았고 지하철이나 버스는 일 년에 손꼽게 그것도 아는 노선만 이용한 지 근 십 년이 되어가는 데 이런 일들을 겪은 것이 유난을 떤 것이 아닐지 모른다. 충분히 헤맸고, 말 그대로 '토 나오게 지하철을 탔다'.


하얗게 질려 앉아서 운다. 도둑맞아 지갑을 잃은 사람 꼴이다. 갈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이렇게 멀리서 수없이 오갔을 생각이 불현듯 나서, 할머니를 보고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은 내가 미워서, 할머니가 너무나 엄마의 마음이라 내가 그 마음을 내 아기에게 쏟고 있어서, 이걸 알게 된 그 순간 이름도 기억 안나는 1호선 역 플랫폼에서 할 수 있는 게 우는 거였다.


엄마 하는 것, 참 힘들다.


아기는 어쩌고 왜 왔냐는 할머니에게 밖에서 기다리는 아기를 보여드렸고 할머니는 엄마가 된 날 걱정하는 듯했다. 죽도 못 먹는 할머니가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먹어보고 나아서 다시 63빌딩 놀러 가자고 말을 했고, 힘들게 끄덕이고 또 끄덕이는 할머니는 준비해 간 말 그 이상으로 다 알고 있었다.


오산역에 내렸다. 다행히 몇 분 넘쳐 도착한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하루 못 본 엄마인데 많이 지쳐있는 모습은 차분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이미 많이 울었을, 아니 버스 창문 밖 보이는 바람에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엄마는 이제 왔냐며 여느 날처럼 아빠 흉도 봤다가 내 소식도 물어보며 장지로 동행을 했다. 물이 가득 차 살짝 부딪혀도 찰랑 거리며 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아직도 엄마를 안아주지 못했다. 며칠간 정리할 것들과 해결할 것들이 있는데 순식간에 터져버릴 엄마가 두려운가 보다. 이 상황에도 엄마는 감정을 추스르고 마음껏 울음을 보이지 못하는 눈치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엄마와 동네 커피숍을 시간 날 때마다 갔었다. 새로 생긴 커피숍 쿠폰을 찍으며 무료 커피에 재미를 붙인 것도 있겠지만 매일 우리의 주제는 할머니 얘기였다. 아침도 같이 먹거나 단골 분식점에 가고 점심은 주로 외식하고 저녁은 요리해서 같이 나눠먹고 엄마와 더욱 밀착되어 함께 했다. 한번 가보고 질려한 오산을 매주 한두 번씩 오가는 엄마가 걱정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입맛 당기도록 끼니를 계속 챙기는 것이었다.


우리는 할머니를 걱정하고 추억하고 다른 계획도 세워봤다가 다시 걱정도 하고 결국엔 할머니의 부재를 담담하게 무서워했다. 엄마와 같은 무게와 색깔의 무서움은 아니다. 부재하는 할머니를 느끼는 엄마가 두렵다. 엄마는 당신의 엄마가 곧 떠날 것이 확정된 것에 막연한 무서움이 있었던 것이다. 나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순간 들이닥치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다른 것을 할 수 없이 날 잡아끄는 엄마에게 주체가 전복된 내 시간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9월 한 달이 이렇게 지나갔다. 이번 9월은 할머니의 죽음까지이다. 10월이 됐지만 아직 9월의 끝자락에 있는 기분이다.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였지만 다독여 놓은 마음에 온 죽음은 참으로 갑작스럽다.


과연 죽음에 호상이 있으랴 싶다. 증손자, 손자들, 형제자매들, 자식들까지 임종 전 모두 다 보고 똥오줌 자식 손에 안 묻히고 돌아가셨다는 할머니. 추석 다 보내고 햇살 좋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공휴일에 가신 할머니. 하나님에게 복 많이 받아 진실된 기도에 응답받았다는 할머니. 십 남매 다섯째 아들에게 시집와서 50살에 남편 여의고 40년 만에 남편과 합장된 할머니. 자식을 앞세우지 않은 할머니. 장녀 할머니. 왼쪽 귀 위 사마귀 달린 할머니. 내 인생 늘 할머니였던 할머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10월 6일 화창한 일요일은 파란 하늘 아래 수원에서 화성문화제를 성황리에 하고 있었고, 내 아기 시우가 수원 해우재 똥 박물관에 방문해서 정말 좋아한 날이다.


그 날은 왠지 슬픈 명절 같았다.


할머니는 그 날 "잘 가아~~" 목소리 크게 가늘지만 길게 말씀하셨다. 귓가에 생생한 할머니 목소리. 다시 꺼내 듣고 싶은 두 자.


할아버지와 합장하기 위해 뿌리는 흙과 함께 내 두 자도 무덤 속 깊이 저장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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