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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Aug 29. 2019

수행적 글쓰기로 훈련에 임하기

20일만에 쓰는 태도

전시와 미술에 대해서 글을 규칙적으로 쓰자고 마음먹은 지 두 달이 되어가는데 글쓰기에 동기 부여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글을 못쓰게 되는 수많은 핑계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 이 글쓰기 공간의 목적은 전시라는 표현 방법을 미술이라는 한 장르로 국한시키는 국내 인식에 대하여 전문지식을 근거로 대중적인 글쓰기로서 전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겠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생긴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이왕가박물관이 이왕가미술관이 되면서 역사 개념이 결여된 미술관에 대한 개탄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전시에 대한 단상들로 다섯 편의 짧은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알게 된 것은 어떠한 사회문화적인 현상들을 미술의 확장적인 정의로서 등록시키면서 오히려 귀납적 사고를 하고 있는 나이다. 이는 미술에 대한 깊은 애착과 더불어 스스로도 써내려간 글들을 근거로 깊이 의심해볼만한 유사종교적인 에너지이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이십 년이 넘은 한 노교수님이 얼마 전 흥미로운 주제의 전공 번역서를 냈다. 번역을 포함하여 책 한 권 내려면 일상생활의 재구조를 마치 혁명과 같이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 정말 '그분은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 미사용의 시차로 잊어버렸을 온갖 로컬 뉘앙스. 성실하게 시간을 소비하며 올랐을 번역의 담벼락. 독어를 영문 번역과 비교하며 좀 더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의미를 파악하여 한국어를 선택하는 고뇌. 이러한 것들이 짐작되어 지레 숨이 턱 막힌다. 만나기도 어렵거나 사자가 된 저자 글을 번역하는 것보다는 저자가 나인 글 쓰기가 그래도 장점이 많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어의 이해에 대한 최소한의 간극을 줄이려고 스스로 노력할테니 말이다.


쓰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수집물로 파생하는 또 다른 수집을 하다가 다른 주제로 일탈하고 일탈이 또 다른 일탈을 부르고 점점 다른 노선의 주제들만 생산되고 글로 쓰이지 못하고 잘 쓰인 글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처음의 자리를 찾아가려면 버퍼링이 걸려 메모하고 접어두고 다시 들추기를 반복한다. 잠시 며칠간 여행으로 활자로부터 도망갔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관심 용어를 검색하여 관련 글을 읽고 있다.


읽지 못하면 쓰기라도 하자라는 시작이 이제는 쓰지 못하면 읽기라도 하자라는 실천이 되었다. 못 읽어 괴롭던 시절이 이제는 못 써서 더 괴롭다니 쓰기와 읽기라는 이 루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평생을 예감한다. 유년기 시절 가방 속에 들고 다니던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국어 교과서는 가히 인체 과학적 수행 기술서이다. 우리가 배운 것은 언어가 아니라 수행술이었던 것이다.


아기를 재우고 시간이 생겨도 펴지 못할 노트북이다. -항상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내 손에 쥐어진 시간은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꿈속에서 노트북을 펴고 깨고 나면 백지상태이다.


오전 어린이집 등원을 시키면 육체는 널브러질 시간을 알린다.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이 엄마들에게는 그리니치 표준시와 같은 절대적인 시간대이다. 계속 이럴 수는 없을 터, '하루에 원고지 5매를 쓴다'는 김훈 작가의 '일필오!'를 내게도 적용해 볼 생각이다. 마치 글쓰기 무림고수가 알려준 제1 기술처럼 매일 공백 포함 1000자에 도전 하여 단련의 길을 떠난다. 신생아들에게 일어나는 100일의 기적이 내게도 일어날지 기대를 품고 도전한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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