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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Jan 17. 2020

허미자 작가의 <섬, 아닌 섬> 전시 리뷰

‘묵흔(墨痕)’기법

광화문에 위치한 갤러리 내일에서 지난 1월 7일부터 16일까지 진행한 <섬, 아닌 섬> 허미자 초대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쓴 전시 리뷰이다.



   

이번 전시 출품작은 모두 <무제>이다. 갤러리내일에 걸린 2019년 제작 작품 전시 이미지


2019년도 작품 전시이미지


2004년도 작품은 미디움을 활용한 수묵 기법을 볼 수 있는데, '수묵이 무엇인가', 재료적, 표현적 측면상 어디까지 수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2004년 작품 일부 확대 이미지, 2004년도 작품에서 발견되는 '틈'


섬의 일각들을 재현해 놓은 작은 화폭은 관객의 눈을 게슴츠레 뜨고 뒷걸음쳐 멀리서 보도록 주문을 건다. 작품으로부터 몇 발자국 뒤에서 진가가 발휘되는 전통적인 평면회화 감상법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번 전시는 허 작가가 섬을 소재로 그린 2004년과 2019년 제작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2004년 제작 작품들은 두터운 먹과 미디엄의 균열 기법을 통해 그 틈들의 군집과 표면의 높낮이에서 오는 밀도감에서 에너지를 자아낸다면 최근작들은 섬의 매력을 볼 수 있는 그 시간대로 관객을 쉬이 초청해낸다.


섬은 바다 위 빛의 잔망들과 함께 인상을 만들어낸다. 해를 그리지 않았지만 화폭 속 이 재현의 피사체들은 햇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 결코 실제와 동일할 수 없는 재현의 한계를 허 작가만의 ‘묵흔’ 어법으로 환원해놓는다. 이러한 어법에서 인상파 작가들의 고민이 발견되는데, 허 작가의 초지일관적 작품 세계는 ‘먹’이라는 재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색채를 가지지 않은 먹의 농담을 가지고 빛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온 흔적이 보인다.


마치 ‘섬 시계’와 같이 각 섬들의 드러난 표면 정도로 빛을 느끼고 시간을 추측하게 되는 깊은 여운은 이 재료적 특성에 닿아있다. 이는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점묘 기법까지 개발한 색채 과학과는 전혀 다른 동양회화의 주 재료인 먹을 통한 허 작가만의 고유 기법이다. 섬의 일각으로 심연의 그 형체를 알 수는 없다. 허나, 이를 품고 있는 바다의 저편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 아득한 평온함을 선사한다. 지긋히 바라보게 해주는 장치이자 공간적 분리 감을 선사하는 이 바다는 최근 제작한 작품에서는 공백으로서 정제되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려진 효과를 발휘하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2019년도 작품 전시이미지


전시의 심연에는 기이한 섬 속에서 만났을 법한 만연한 꽃잎들, 흡사 대형 잎사귀가 관객을 세운다. 검은 꽃 그 앞, 혹은 뒤로 과감하게 가로지르며 중첩되는 나뭇가지들이 관객을 끌어들인다. 많은 표현으로 설득을 시도하지 않은 채 말을 접고, 한 번의 '일할'과 같이 체험의 고지에서 외마디로 소리친다.


허 작가의 묵흔은 이렇듯 무심하다.


기법면에서 허 작가의 수묵을 읽어내는 데는 독특하게 사진 기법이 소환되기도 한다.

대형 잎사귀, 작은 풀잎들, 나뭇가지들은 평면 위에 '그려져' 있지만 마치 셔터에 의해 순간 촬영된 사진과 같이 허 작가의 눈에 담긴 피사체로서 작동한다. 먹의 농담에 의한 두께가 생겨 각기 다른 빛 투여도를 갖는다. 먹의 농담 기법으로 거리상 선후를 알 수 없는 이 대상들은 화폭 위에 고스란히 중첩되어있다.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의 여러 대상마다 노출시간을 달리하여 카메라 없이 사진을 중첩 제작한 ‘레이요그래프(Rayograph)’ 기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렇듯 허 작가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서양의 대표적인 미술사조인 유화로 그려진 인상주의와 사진의 초현실주의가 발견되는 기이한 수묵 회화이다. 수묵의 장을 한층 깊고 넓게 펼쳐주는 작품들이다.


빛에 대한 밀도 있는 연구이자  작가가 걷고 있는  여정의 발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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