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흔(墨痕)’기법
광화문에 위치한 갤러리 내일에서 지난 1월 7일부터 16일까지 진행한 <섬, 아닌 섬> 허미자 초대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쓴 전시 리뷰이다.
섬의 일각들을 재현해 놓은 작은 화폭은 관객의 눈을 게슴츠레 뜨고 뒷걸음쳐 멀리서 보도록 주문을 건다. 작품으로부터 몇 발자국 뒤에서 진가가 발휘되는 전통적인 평면회화 감상법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번 전시는 허 작가가 섬을 소재로 그린 2004년과 2019년 제작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2004년 제작 작품들은 두터운 먹과 미디엄의 균열 기법을 통해 그 틈들의 군집과 표면의 높낮이에서 오는 밀도감에서 에너지를 자아낸다면 최근작들은 섬의 매력을 볼 수 있는 그 시간대로 관객을 쉬이 초청해낸다.
섬은 바다 위 빛의 잔망들과 함께 인상을 만들어낸다. 해를 그리지 않았지만 화폭 속 이 재현의 피사체들은 햇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 결코 실제와 동일할 수 없는 재현의 한계를 허 작가만의 ‘묵흔’ 어법으로 환원해놓는다. 이러한 어법에서 인상파 작가들의 고민이 발견되는데, 허 작가의 초지일관적 작품 세계는 ‘먹’이라는 재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색채를 가지지 않은 먹의 농담을 가지고 빛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온 흔적이 보인다.
마치 ‘섬 시계’와 같이 각 섬들의 드러난 표면 정도로 빛을 느끼고 시간을 추측하게 되는 깊은 여운은 이 재료적 특성에 닿아있다. 이는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점묘 기법까지 개발한 색채 과학과는 전혀 다른 동양회화의 주 재료인 먹을 통한 허 작가만의 고유 기법이다. 섬의 일각으로 심연의 그 형체를 알 수는 없다. 허나, 이를 품고 있는 바다의 저편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 아득한 평온함을 선사한다. 지긋히 바라보게 해주는 장치이자 공간적 분리 감을 선사하는 이 바다는 최근 제작한 작품에서는 공백으로서 정제되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려진 효과를 발휘하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전시의 심연에는 기이한 섬 속에서 만났을 법한 만연한 꽃잎들, 흡사 대형 잎사귀가 관객을 세운다. 검은 꽃 그 앞, 혹은 뒤로 과감하게 가로지르며 중첩되는 나뭇가지들이 관객을 끌어들인다. 많은 표현으로 설득을 시도하지 않은 채 말을 접고, 한 번의 '일할'과 같이 체험의 고지에서 외마디로 소리친다.
허 작가의 묵흔은 이렇듯 무심하다.
기법면에서 허 작가의 수묵을 읽어내는 데는 독특하게 사진 기법이 소환되기도 한다.
대형 잎사귀, 작은 풀잎들, 나뭇가지들은 평면 위에 '그려져' 있지만 마치 셔터에 의해 순간 촬영된 사진과 같이 허 작가의 눈에 담긴 피사체로서 작동한다. 먹의 농담에 의한 두께가 생겨 각기 다른 빛 투여도를 갖는다. 먹의 농담 기법으로 거리상 선후를 알 수 없는 이 대상들은 화폭 위에 고스란히 중첩되어있다.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의 여러 대상마다 노출시간을 달리하여 카메라 없이 사진을 중첩 제작한 ‘레이요그래프(Rayograph)’ 기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렇듯 허 작가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서양의 대표적인 미술사조인 유화로 그려진 인상주의와 사진의 초현실주의가 발견되는 기이한 수묵 회화이다. 수묵의 장을 한층 깊고 넓게 펼쳐주는 작품들이다.
빛에 대한 밀도 있는 연구이자 허 작가가 걷고 있는 긴 여정의 발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