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와 생성
갤러리현대 이사인 양찬제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상업화랑 을지로에서 지난 10월에 진행되었던 <젓가락 복음>('19.10.30.~11.17.)에 출품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쓴 리뷰이다.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사업 리뷰 비평에 제출한 글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응시들이고,
우리는 어떤 상상들이다.
우리는 어떤 일반성들이고,
우리는 어떤 경쟁적 지망들이며,
우리는 어떤 만족들이다.”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에서 발췌
송수영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사실 7장의 그림을 한 자루의 연필로만 그리고 마지막 장은 다 그리고 남은 몽당연필 한 자루가 당당하게 비어있는 마지막 장 중앙에 오롯하게 위치한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 살았던 나무-연필로 그린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 (2012) 작품을 통해서이다.
소묘력으로 작품에 감탄하는 것이 낯선 동시대현대미술 시대에 숲이었고 나무였고 흑연인 연필이고 이제는 그림이 되어 제목으로서 이미지로서, 한 장의 도화지 위 근거리 과거 모체와 같이 몽당 연필에 온 공간을 할애하여 연결되어있는 대상 모두를 다 존재시킨 작가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화면 속 회화적 구성력과 제목을 부여받은 조소적 재현이 합심하여 송 작가가 다루고 있는 재료에 대한 존중의 감정을 드러낸다. 도화지 위에 아주 잘 그려진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스치고 지나온 순수 과거의 나무와 숲, 흑연 연필과 이미지라는 현재를 반복시킨다.
대상에 대한 묘사적 내용보다는 실재를 밝히는 드로잉의 다른 태도이다.
정교하고 묘사적으로 재현해놓은 흑연 연필은 사라지기 전 볼품없이 작아져 흰 도화지 위에 올라올 수 있었지만 이는 새로운 등장처럼 보일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작품 속 현존하는 당당한 오브제가 되었다. 삶과 죽음을 대치시키거나 순환시켜 표현한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반복’을 통해 차이 나게 등장하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의로 외형이 변하고 시간이 흘러 유기적 존재로서 결국 사라짐에 처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차이와 반복』을 저술한 철학자 질 들뢰즈가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수많은 잠재적 대상들이 포함되어있는 엄마의 몸을 언급하면서 아래와 같이 잠재적 대상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 더욱 자세히 비유한다.
“엄마의 몸 안에는 수많은 잠재적 대상들이 포함되어있다. 그 대상들을 소유한다고 보면 잘못이다. 오히려 그 대상들은 엄마의 몸 안에 박혀 있고, 게다가 다른 세상의 나무들처럼, 고골리의 코나 데우칼리온의 돌들처럼 심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작가는 응시라는 기본자세를 반복하며 상상하고 질문한다. 다른 존재들에서 모든 존재를 만들어낸다.
창작의 욕구는 반복하는 일상의 응시 관계에서 대상으로의 복귀가 아닌, ‘박혀있고, 심겨있는’ 잠재적 대상들을 조각적 재현들로 하나씩 호출한다. 하얀 천 7마에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기저귀를 재단하고, 한복을 다시 잡아서 그 천에서 원피스를 재단하고, 그 원피스에서 나시티를 재단하고, 그 나시티에서 아기 턱받이를 재단하여 켭켭이 대상들을 만들어내어 전시장에 줄줄이 걸어둔 <낳기>(2005)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난 그녀가 만든 것을, 그러니까, 두 번을 쥐었다. 한 번은 전시장의 따뜻한 돌덩이, 한 번은 작업실에서의 차가운 깡통.
재생 트레이싱지를 덮어 고무줄로 고정시킨 향초 깡통을 선물이라며 내 손에 쥐어준다. 고양이 밥이 들어있던 작은 깡통을 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향초를 만들었다. 선물을 받았던 작업실은 작가가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가구들이 산재해있다. 전시장 밖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 만나게 된 날, 먹은 바닐라 머핀도 작가가 만든 것이다. 다재다능하고 뛰어난 소묘력을 함께 갖춘 작가가 조소과 박사과정을 끝내가고 있는 것을 만난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시각예술로서 조각은 언제부터 특별한 어려움을 겪었을까.
에릭 홉스봄은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을 주제로 한 글에서 회화와 더불어 조각을 20세기의 비실용적인 시각예술이라고 표현하고, 공공 기념물이나 건물의 장식을 모더니스트 건축이 거부하면서 그 시장도 함께 붕괴되고, 세계대전을 겪으며 조각상의 대학살이 진행되어 일축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조소과 출신 예술가가 돌이나 흙, 철, 나무를 상대로 과한 육체노동을 피해 선택할 수 있는 표현방식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불균형하게 흘러온 시각예술사에 대하여 환기를 갖게 해 준 만남이었다. 2020년 작가의 삶에도 아방가르드 예술 실패의 날카로운 잔재가 튀어있지 않은지 이 간단하지 않은 생각을 전기밥솥에 조약돌을 보온해 둔 <돌 - 밥>(2019) 작품으로 온기를 준비해 둔 작가의 전시장으로 이동시킨다.
사기그릇에 진주를 밥알 삼아 관객에게 내놓은 <진주 - 밥>(2019)은 인어공주의 눈물을 받아 밥을 지었는가. 웃는 이모티콘을 시작과 끝으로 ‘^^오늘도행복한하루되세요^^’문구가 적힌 일회용 나무젓가락 <젓가락 - 복음>(2019) 작품은 서비스교육을 받은 텔레 마켓터를 통해 매우 자주 듣지만 상징적인 이 문구를 젓가락 포장지에 인쇄해놓았다. 도처 떠다니는 마구잡이 맥락 없는 유사 내용들이 전시장으로 소환되지만 이 작품을 읽어내는 대상으로서 삼은 자를 사모하는 작가적 유머와 자세에 집중해보자.
작가 본인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만든 자이지만 작가는 사실 작품을 가장 먼저 읽어내는 첫 번째 관객이다.
일상에 대한 경쟁이나 아귀다툼, 그로 인한 남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은 막연한 대안, 개선되지 않는 불만과 치기 어린 투덜거림이 아닌 진지하고 차분한 상차림의 자세이다.
평범한 일과와 일상 속에서 스치기 쉬운 사물을 주 소재로 작업을 일삼는 작가는 이번 전시 서문의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것들을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원본만이 갖는 ‘일회적 현존성’의 귀환을 소망하는 문구이다.
이 시대에 찾기 힘든 그 반짝이는 경험은 기계 복제시대 이후에 예술만이 지닌 고유 부분이 기계로 대부분 대체되거나 아우라의 소실까지 언급되지만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아우라를 호출해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아방가르드 이래 지금까지도 시대에 갇혀있는 예술의 족쇄를 풀어주려는 의지의 행동.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세계를 읽어 내려가며 작가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법. 내면의 고뇌를 토해내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반복 속에서 약간씩 역승하는 강도의 표출. 그것이 분출보다 더욱 큰 효과와 결과를 창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작가는 그 넓고 굳은 배포를 <지구 - 알약>(2019)과 같은 작품으로서 그 특이성을 언어화한다.
지구를 점토와 같이 굴려 타원의 작은 알약 단위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을 먹으면 나는 진정 지구를 먹은 것인가. 지구를 먹어보라고 제시하는 작가는 악마적 유혹인가. 지구에 사는 내가 지구를 먹는 것은 환각과 같은 카타르시스인가 치유의 약인가. 미세하게 작은 사물에 대한 응시만으로 ‘지구를 폭파시키는’ 질문과 상상적 경험에 도달하게 한다. 응시의 본질이 작동되는 순간이다. 작품 감상의 운동성이라 명명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가 미와의 조우는
‘천성적으로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마치 황량한 자연 안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던가.
송수영에게 있어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런 전위적인 순간의 아우라를 본인 스스로와 관객에게 ‘쥐어주기’ 위한 ‘길 찾기-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