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예술가가 되기 위한 견고한 디딤돌들이 되는 것

언택트 시대 예술 디알로그 No.10

by 엘로디 옹그

가던 길을 잠시 쉴 때가 있다.


정신없이 와버려서 어디인지 모를 때, 너무 뛰어와서 숨이 차오를 때, 한 발자국 떼기 조차 참으로 무거운 걸 갑자기 느낄 때, 길을 잘못 들어서서 다시 돌아갈 길이 엄두가 안 날 때, 어쩌면 사는 게 재밌어서 혹은 사는 게 빠듯해서 시간을 못 느낀 채 많은 세월을 보냈을 때,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더 이상 걷기 싫어 앉았고 그것이 당장 편한 것을 알았을 때.


작년이 내게는 그러한 해였다. 어느 무엇 하나 질문이 생기지 않았던 무미건조한 해. 그저 아이가 크는 것만 관찰하고 반복 생활을 하던 해. 우울하지도 아주 행복하지도 않은 일상들의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등장. 항상 비전을 세우고 꿍꿍이를 짜던 나와 가장 닮지 않은 해.


8년 만에 서울로 복귀했을 때 망각이 발동하여 지인들이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시차를 느꼈고, 어느새 내 옆에 이렇게 새 가족이 생겼을까 새삼스러움이 반짝 나타났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미술작가들에게 작업이 일상이 아니게 되어버린 긴 시간은 무슨 작용을 일으키는 것일까


얼마 전 개인전 전시서문을 쓰게 되면서 연을 더 깊이 갖은 권자연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차분한 그녀의 기억술은 미학적 드로잉과 조형물을 생산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작업으로서 그녀 자신을 불러일으킨다.


권자연 작가 홈페이지 https://www.jayeonkwon.com/




질문 1>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포스트코로나 시대 이후 어떻게 예술을 보여주고 계신가요?


답변 1>

직업적인 측면에서는 시각예술을 하고 있는 작가예요. 이런 질문을 하면 선뜻 답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어요. 전업 작가이긴 하지만 머리가 분산되어있는 것 같아서요. 가족이라는 부분, 애들이 이제는 다 커서 모든 것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끼니때만 되면 그곳에 있어야만 할 것 같고 걱정되고 집으로 가게 되죠. 작업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형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죠.


사실 저는 전업 작가, 전업 주부라는 명칭보다 직업을 물으면 종종 공간으로 답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작업실과 집’이라고요. 아마도 제가 최소한의 마지노선으로 이 구조를 살려둠으로써 제가 작가로서의 직업과 주부로서의 직업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포스트코로나 시대 이후 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은 이 코로나는 언젠가 종식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섞여있어서 일터인데요.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는 기존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요. 작가들이 비대면 시대 때문에 여러 가지 방식을 시도하고 있잖아요. 온라인에서 대중을 만나기 위해 작품을 VR, 3D 비디오 방식 등을 취하지만 아직 저는 그 방향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저에게 전시란, 작업 앞에 서서 작업이 주는 공간과 힘, 시간성을 느끼는 것인데, 작업의 외형을 다른 매체로 그대로 옮기는 것, 즉 재현은 마치 사막 위에 만들어진 라스베이거스 도시를 걸을 때의 느낌 같을 것 같아서 흥미조차 없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코로나가 장기화가 되는 조짐이 보이고 심지어 인류는 앞으로 2~3년의 주기로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보고서들이 나왔다 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 고민, 질문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질문 2> 현재 하고 계신 일로 제일 힘들거나 곤란한 점은 무엇인가요?


답변 2>

곤란보다 고민에 가까운 건데 작업 측면에서 생각을 한다면 내 작업이 보이는 ‘형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항상 전시를 하고 나면 그 전시가 너무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그때 이런 형식으로 이렇게 했다면 작업이 더 잘 보였을 것이라는 일말의 후회로 인해 끝나고 나사서도 다 끝난 전시장을 두고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해봐요. 그 연장선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도록이에요. 도록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전시가 어떻게 또 다른 현장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 고민을 해요. 이러한 고민들로 봄에 끝난 상업화랑에서의 개인전도 아직 도록을 못 만들고 있죠. 여느 도록과 같이 기록으로서 만들지, 작업으로 이어지는 도록으로 만들지는 계속 고민 중에 있습니다.


힘들거나 곤란한 점이라면 좀 더 현실적인 것들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작가 활동을 하기 위한 경제적인 자립이에요. 저도 강의는 지속적으로 해왔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 남편의 돈으로 제 작업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앞으로 기금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될 것이고 계속 이렇게 집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돼요. 제 연배 작가들을 만나면 항상 앞으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대안과 아이디어들을 나누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지요.


질문 3> 언택트 시대가 되어 예술 측면에서 나아진 점이나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답변 3>

완전히 차원이 다른 감각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마치 우리에게 손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은 존재하지 않았던 신선하고 완전히 다른. 그런 감각에 대한 가능성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될 것 같아요.


나아진 점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일반적으로 보는 것들, 매일 하는 드로잉, 축적되는 작은 기록들과 같이 그 작가가 갖는 ‘태도’가 보이기 시작해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더 와 닿죠. 이전에는 인스타나 페이스북 같은 SNS 경우 전시정보 공유, 홍보가 더 중요한 것이었지만, 코로나 이후- 아무래도 SNS를 통한 소통이나 만남이 더 많아져서 인지 몰라도 - 작가의 일상적인 것들이 기록이나 스냅샷이 아닌 뭔가 작업적인 측면으로 더 와 닿고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인지되기 시작한 감각이 거대한 사이즈에 대한 허무함 같은 감각이에요.


다가갈 수 없는 아주 큰 작품, 저 멀리 있는 거대한 건물, 이뤄질 수 있을까 한 방대한 무엇에 대한 회의감, 허당 같은 이상한 느낌들이 생겨나요. 그러면서 뭔가 가까운 것, 사소한 것들에 대한 중요함을 느낍니다. 사이즈에 대한 이런 감각은 저도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 개인과 내 작업은 어떤 태도로 얘기될 수 있는지 등의 전달 방식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이라는 것이 이런 맥락에서 연장선으로 같이 이어지고 있는 고민이고요.


질문 4>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는 예술 측면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답변 4>

놓치고 있었던 것. 어려운 질문이에요. 오히려 지금 하게 된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위 질문에서 답변을 한 것과 이어지는 답변인데, 작가의 태도가 잘 안 보이다가 한 사람의 태도에 집중하게 됐어요. 미술관에서는 정제된 결과물로서 작품만 보죠. 정제되어 완성된 작품을 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예를 들어 매일매일 드로잉을 해서 업로드하는 작가를 본다든지 작업 과정의 것들을 본다는 것은 평소 터부시 했던 어떤 측면을 통해 작가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질문 5> 아쉽게도 실현하지 못한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답변 5>

아직까지는 없어요. 개인 혼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실현하고 있지 못한 프로젝트는 있죠.

비어있는 상가들에 밤새도록 전시를 볼 수 있도록 불을 켜놓는 거예요. 작은 공간 여러 곳에서 한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방법도 있고, 여러 명의 작가가 한 공간씩 자기의 작품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겠죠. 아니면 아예 익명으로 작품을 전시한다든지 하여 온라인 홍보를 한다면 맵을 만들어 도시 밤 중 곳곳의 불이 반짝반짝 거리는 걸 상상해 봐요.

어느 지역에서 누군가의 작품을 밤새도록 볼 수 있는 전시가 있었으면 해요. 코로나가 활동 중인 지금은 가능성 없는 얘기이긴 하지만 아마도 코로나 시국 때문에 더욱 가능한 프로젝트 일지도 모르고요.


질문 6>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영향을 받은 예술가나 인물이 있나요?


답변 6>

사실 어느 누구 한 명이 떠오른다기보다 7-80대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보게 돼요.

예를 들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를 본다든지 '아트 21' 등등 굉장히 많잖아요. 이름도 잘 모르는 분들이지만 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유명하니까 인터뷰로 남겨졌을 텐데 그분들의 지금까지의 작업을 보면서 작업을 절대 그만두지 못하겠다 생각을 해요. 그 노년의 작가들이 예술을 지속해 왔다는 것, 그 지속성의 힘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을 기록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제가 보고 영향을 받고요. 그런 분들의 말 하나하나 예술을 지속하는 모습이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2016년에 세운상가에서 한 전시는 제가 7-8년간 작업을 쉬었다가 이제는 작업을 그만두느냐 계속 이어 하느냐 라는 결단의 순간에 만든 것이었어요. 다시 말해 쉰 기간만큼 녹슨 엔진을 다시 돌리고 예술을 계속하려면 굉장한 힘이 필요했는데, 그때 나이가 많은 여성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고 저도 다시 작업할 수 있는 동기를 얻게 된 것이죠.


질문 7> 예술가의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변 7>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은 디딤돌들이 되어서 제가 작업하려는 밑단에 있는 (힘을 받혀주는) 느낌이 있어요. ‘사명’이라는 것이 대단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예술가가 되기 위한 견고한 디딤돌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가로서 작품을 통해 해야 하는 발언들을 하고, 그런 각자의 위치가 단단하게 되어 그것을 디딤돌 삼아 또 다른 작가들이 그 위에서 예술가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예술가의 사명이란 어쩌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발언을 가장 견고하고 확실하게 예술을 통해 말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작품 실견이 안 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