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을 쓸 때마다 갈등 끝에 마무리를 짓긴 하지만 이번 서문 같은 경우는 곤란함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전문적인 리뷰 글은 언젠가부터 기획되어 자연적인 흐름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미술계이고 작가의 고찰에서 임시적인끝 지점을 어떻게든 기록해놔야하는 임무의 갈등으로 작성했다. 관객을 초대하는 마음에서 작가에 대해 학습되어있는 앎을 다스리며 대중적인 서문을 쓴다고는 하지만 전시기획자가 가장 깊이 다루는 개인전의 작품들에 어찌 비판적 시각이 없으랴.리뷰가 귀한 세상에 전시 만드는 큐레이터의 심정이다. 전시장 문을 열어주는 서문도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진지함이 지나쳐도 과하지 않을 내용의 것, 마치 콩알과 깨진 돌을 분류하는 미세한 작업이었다. 다 말하지 못함의 중얼거림.이런 저런 형식으로 머리를 굴리다결정한 전시서문의 모양새가 아래와 같이 나왔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쉽게 쓰는 방법에 대해 좀 더 단련할 과제를 스스로에게 남기면서 어쩌면 그것은 환상에서나 가능하다며 내심 위로도 곁들이며 우여곡절 끝에 마감이 와야 마감 당하는 그런 글이 또 나왔다.
전시제목은...(브런치 제목이 30자 이상부터 입력 불가라 아래 전체 제목을 적어본다)
수림아트랩 신작지원 2022 선정 프로젝트_요한한 개인전
세어보았다 MÉNÉ 세어보았다 MÉNÉ 달아보았다 TEKEL 나누었다 UPHARSIN
사라짐과 나타남의 세계 속 파편화된 몸
-글. 홍희진 독립큐레이터
"어떻게 세상은 이런 붕괴에 그토록 취약할 수 있고, 이런 완전한 현실성의 독재에게 그토록 취약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정확히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사라짐-에 매혹될 수가 있는가?"[1]
초연결사회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속성은 계곡의 맑은 물과 같이 탈은폐적이다. 모든 연결고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 깊이와 생태를 말해주지 않는다. 듣고 말하기의 응답과 정답의 문제가 아닌 감각과 징후에 대한 질문과 사유의 문제이며 인간의 몸과 세계의 상동성 문제이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 온오프 세상을 넘나들지만 오히려 분절되고 있는 인간의 소통방식에 요한한 작가는 기원적인 질문을 갖는다. 몸의 선험적인 요인들과 태곳적 몸의 감각에 천착하는 작가는 마치 몸의 고고학을 파헤치듯 몸의 파편들과 몸짓, 피부의 표면을 고찰하며 신체적 ‘공명’, ‘몸 감각’을 주제로 작품들을 선보인다.
북(鼓) 소리, 빛, 몸동작 등의 퍼포먼스 현장 요소들과 관객들의 즉흥적 참여까지 수용하며 위계없는 연출을 펼치는 작가는 오픈 채팅방을 열어 ‘대화 가능한 혹은 중얼거림과 같은’ 채팅창 문구들에 이어짐과 끊김의 호흡을 수락한다. 탈중심의 리좀 구조 연결망처럼 지속적으로 연결 접속하며 사건의 잠재력을 생성한다. 이번 전시는 초연결사회 속 네트워크 참여자로서 인간의 닫힌 몸은 무엇을 상실하고, 소여하였는지 질문하면서 파편화되어 조각난 몸, 디지털로 변모된 몸, 기계화된 몸, 자기 현실성에 들러붙은 몸 등 시스템에 포획된 경직된 몸과 지배받고 지배하는 힘들의 평형상태인 무브먼트 제로의 몸 등 무수한 연결 접속들로 표현된 사라짐과 나타남의 이중 세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달에서 흘러내리는 빛은 한낮의 우리 삶이 벌어지는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의심스럽게 빛을 던지는 구역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 혹은 지구의 부속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곳은 더 이상 달이라는 위성을 지닌 지구가 아니다. 스스로 달의 위성으로 변한 지구이다.” [2]
달과 지구 사이에서 ‘달빛’을 ‘디지털의 은총’으로 ‘지구’를 ‘인간’으로 번안하여 본다면, 스스로 '디지털'의 위성으로 변한 '인간'으로 성립 가능한 이야기이다. 연이어 보드리야르의 문구를 덧대면, “우리의 신체는 멀리서 우리를 지배하는 기계 장치의 환영지, 허약한 부속, 유치한 장애에 불과할 것이다.”[3] 달과 지구 관계를 빌어 우리는 여기서 인간과 기계 장치의 관계, 사라짐과 나타남의 세계에 대해 환기할 수 있다. 고대 시간관을 간직하고 있는 달을 소재로 한 작품 <Long gibbous series>는 작가 특유의 공명 원리를 따르고 있는데 위의 관계들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지부스(gibbous)는 반달과 보름달 사이의 볼록하게 생긴 철월(凸月)을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사라진/보이지 않는/잠재적 세계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형체는 제목에 반하고 있는데 달의 부속지와 사라짐 이후 차오른 달에서 남은 부분을 직선으로 절단되어 초승달 특유의 형상적 이지러짐, 지구로부터의 환상지를 삭제한다. 작품에서 지부스 부분은 이미 형체가 사라짐의 세계로 진입했지만 실제세계에서 행성으로서 달의 온 부피는 변함이 없다. 사라짐은 이토록 존재하지만 그 깊이나 거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타남의 세계에서 이지러짐을 잃은 달 조각은 규모를 드러내지만 작가는 작품 제목을 장치로 사라진 지부스를 가리킴으로서 관객의 사유를 끌어낸다.
나타남과 사라짐의 이중 세계 속 질문과 사유가 없어진 순간 사라질 운명의 사라짐의 세계에 반하여 보이고 물리적인 규모를 갖는 나타남의 세계는 주체적인 힘을 무력으로 갖는다. 나타남 세계의 획득과 같은 방식으로 디지털이 무력으로 신의 은총을 갖게 되었다면 사라짐의 세계는 붕괴했는가?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곳에 무엇이 서식하는가? 인간은 무엇에 매혹되어 흔적, 침묵의 복화술에 시지각이 닫히고 소리 내지 못하는 것인지 몸의 태곳적 감각으로 돌아와 탐구하고자 한다.
시스템으로 포획되지 않은 세계, 사라짐의 세계에서 애매(obscure)하고 지각 불가능하지만 ‘있음’의 낌새와 감각들을 발견하기 위해 작가는 몸동작, 시선, 소리, 각종 몸 조각, 몸 흔적 작품들을 통한다. 이를 통해 말과 문자로 교체 불가한 것들의 사라진/보이지 않는/잠재적 세계로 안내한다. 작가는 이 세계의 좌표를 태곳적 사건 지도에서 더듬거리며 언어의 세계인 달의 시간, 몸의 시간, 기계의 시공간을 모두 작동시켜 상징적 상황들로 펼쳐놓는다. 위상적 시간관으로 2022년 9월 전시장 좌표는 고대 사건의 순간에 도달한다. 고대 신 바빌로니아 연회장에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 성물로 궁중 연회를 즐기던 중 몸 조각인 손가락이 벽에 나타나 히브리어 글씨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다니엘 5:25)’을 기록한 순간이다. 바로 고대 신 바빌로니아 멸망 직전이자 세계 붕괴에 관여한 나타남과 사라짐의 순간이다. 그때도 지금도 매혹되어 시스템에 스스로 포획되는 우리 앞에 무엇이 도착해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이번 전시는 펼쳐진다. 우리는 요한한 작가 특유의 관객공간인 오픈 채팅방과 전시장이라는 시스템에서 무수한 연결접속의 몸으로 서식하는 새로운 작품들을 통하여 비밀과 상상이 자유분방한 '그곳'으로 이동한다.
[1] 쟝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12, 85쪽
[2]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윤미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14, 144~145쪽
[3] 1과 같은 책, 25쪽
[CREDIT]
제작/연출: 요한한 (Yohan Hàn)
기획: 홍희진 (Elodie Heejin Hong)
퍼포머: 착(Chak)
권순국 (Kwon Soonkuk)
서한솔 (Seo Hansol)
한은혜 (Han Eunhye)
오혜민 (Oh Hyemin)
정한별 (Chung Hanbyul)
백승진 (Baek Seungjin)
곽현빈 (Kwak Hyunbin)
비보이 도우너 (Bboy Douner)
비보이 미어캣 (Bboy Meercat)
후원: 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랩
협찬: 레드불 (RedBull)
도움 주신 분들: 박동규 (Park Donggyu)
송현채 (Song Hyunchae)
JJ Art
난계타악기공방 (Nankye Korean Classical Music Pulsatile Manufa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