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할 수 없는 공간에서 어렴풋이 익숙한 산과 돌로 된 풍경을 만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절대 파악할 수 없는 객체의 진실이다. 화폭에 그려진 작가의 감각만이 눈앞에 도착해있다. 이하은 작가의 회화 앞에서 우리는 본다는 것에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인다. 인간 감상자인 우리와 예술 작품만 마주하고 있다. 회화 앞에서 무엇을 탐색하고 있는 지 과녁의 정확성을 잃은 채 작품으로부터 기인한 단서를 갈구할 뿐이다. 기이한 풍경들이 인지할 수 없이 형상들과 표면들로 ‘자세하거나 덜’ 그려져 있고 캔버스에 캔버스를 이어 조형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들은 평면이라는 캔버스 매체를 재인식하며 전통적인 삼차원 환영주의를 거부해야 한다는 20세기 중반 형식주의 이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주장과 바넷 뉴먼과 스텔라라는 작가가 회화의 틀(frame)에 주목하여 새로운 전개를 펼쳤다는 20세기 후반 미술평론가 마이클 프리드의 주장을 동시에 경유하며 21세기 화가로서 전통적인 환영주의와 틀에 대하여 작가적 입장을 내놓는다. 이 작품들은 삼차원 환영주의를 거부하지도 않았으며 평면성을 적극 수용하여 내용을 누락시키지도 않았다. 작가는 네 모서리의 틀을 작품의 밖으로 연장하고 작품 속에 틀을 더해 차원을 추가하고 있다. 예술 역사학자 마이어 샤피로가 틀은 회화의 장(場)을 한정하므로 틀 자체가 독립적인 기호라고 한 말을 흔들며 틀을 해체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거쳐 온 동시대 화가가 회화의 틀을 사용하는 감각이다.
작가는 다양한 지형을 탐색하고 두 개 이상의 지질 등의 객체 이미지들을 겹쳐보면서 공통감과 이질감을 연구한다. 자연현상들에 관심을 갖고 기이한 기후가 보여주는 형상과 그로인한 풍경들에서 작품의 내용적 시원을 찾는다. 틀 속에 개입한 틀 안팎에서 이질적인 성질들 간 만남을 주선하는 취미를 갖고 있으며 이웃한 객체 간 온도차 점검을 통하여 특유의 색을 추출하여 결과로서 칠한다. 대지 너머 노을을 띤 하늘은 우주적 활동으로 마치 다른 행성에서 반사 받아 생성된 듯 발광적 빛깔을 자아낸다. 작가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산 땅 노을 하늘 풀이라는 객체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작품을 통해 각 객체에 다시 의문을 품게 하며 인간 감상자가 주의를 기울여 찾아낸 단서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믿음도 지식도 작동하지 못하는 작가 특유의 세계를 만들어 시간 감각마저 무력하게 하는 탁월함을 추구하고 있다. 초연결사회인 포스트인터넷 시대 21세기 화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평면작품들을 통해 기술을 동료삼지 않아도 어떤 방식으로 시공간을 다룰 수 있는지, 회화의 제요소들로 실재(reality)를 어떻게 탐색할 수 있는지 고심하고 있다.
평면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으로부터 충분히 뒷걸음 쳤다가 작품에 밀착했다가를 반복하는 사교댄스풍의 동작과 같은 감상태도가 있는데 작가는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있는 전시 공간인 ‘오브’에서 이 작품 감상 율동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입체적인 화면들을 선보인다. 오브가 작은 전시 공간으로서 매체를 변환시키는 미디어적 힘을 잠재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전시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의 작품들에는 인간 감상자와 다른 차원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제목 장치가 있다. 작가는 작품 이미지와 어긋나게 작품 제목에 어떤 내러티브의 파편을 담아 내보내면서 이미지와 제목사이 불균등함을 통해 잉여를 생산한다. 작가는 관객에게 감상공간을 마련해주려는 의도로 공백두기를 한다. 이 공백은 작가가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활용하는 혼란한 감각으로 만들어낸 안정감을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며 초현실주의 기법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감상 장치로서 제목에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에서 익숙한 일상의 객체들을 이질적인 관계로서 배치하며 현실을 넘어선 감각을 보여줬다면 이 작가는 객체들의 이질적인 배치기법과 틀 속의 틀까지 활용하며 인간 감상자가 가진 익숙한 감각을 온전히 버리도록 돕는 제목으로 꼬집어두며 작품의 끝을 맺는다. 배치, 내러티브, 제목 등과 이 글을 총체적으로 이해해도 작품을 온전하게 알 수 없음은 깊고 앞으로도 지속될 전통성을 갖고 있다. 한 가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진실은 작품과 충분히 조우하여 내 감각이 다른 객체를 생성하고 나만 알 수 있는 시공간의 순간에 붙잡히는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루나파크>>에 와있는 것이다.
<<루나파크>>라는 이하은 작가 개인전은 전시 공간 ‘오브’의 오웅진 대표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첨단 기술 기반 예술인 ‘아트테크(Art-tech)’ 밖에서 미디어 매체를 고민하고 있는 오웅진 대표에게 전통적인 두 매체인 ‘회화’와 ‘달’은 기획자로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소재이다. 을지로 오브(of)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을지로 4가는 1910년대 당시 행정지역 명칭이던 경성부 과거 황금정 4정목 부근이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3년 6월 22일자 「황금 유원(黃金遊園)의 별건곤(別乾坤)」 기사에 따르면 경성 남부 산림동 바로 오브가 있는 이 동네에 최초 민간 유원시설로서 ‘황금 유원’이라는 ‘루나 파크(ルナパーク)’가 경성으로 ‘안락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을 늦은 오후 4시에서 밤 11시까지 맞이했었다고 한다. 예술작품을 선보이며 사람을 환대하는 전시 공간 오브가 이러한 황금 유원의 기능을 잇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월세계(月世界)’라는 뜻의 루나 파크는 예술과 근대문명의 산지인 유럽에 영향을 받아 여가와 소비를 지향한 유럽문화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득한 달빛을 암시하는 황금, 월 세계, 달은 한국인에게 특별하다. 만월(滿月) 아래 불놀이를 통해 건강과 풍년을 염원하거나 꾸준히 변하고 반복을 하는 달에 술잔을 기울이며 시리고 애잔한 천만가지 심상을 문학과 시로 실어온 달은 우리 문화에서 익숙하다. 이번 이하은의 개인전 <<루나파크>>는 1910년대 성행한 근대유원지 이름에서 영감을 받은 기획자와 작가 간 대화로 시작됐지만 무상하게 언제나 존재해온 달 아래 세계의 진리를 묻는 작가의 세계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늘 펼쳐져있고 내던져져 고심한다. 이번 개인전 작품들을 통해 달에 심상을 싣듯 영원과 한 끗 차이인 찰나의 시공간을 경험하길 바란다.
이하은 작가와의 첫 만남을 갖은 녹번동 스튜디오 현장 모습@엘로디 옹그 촬영/ "스튜디오에 늘 힌트가 있다."
*을지로 오브 공간은 오웅진 대표가 미디어 밖에서 미디어를 연구하는 전시공간으로서 을지로 4가 32 3층에 위치해있고 월화 쉬고 매일 오후 1시에서 8시까지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