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좋은 아침!
요즘은 종종 이렇게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새로운 아침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또는 좋은 거라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주문으로.
누군가 나에게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한결같아요.’
라고만 대답한다.
그러면 물어본 사람이 알아서 생각하겠지.
내 병에게 새로운 ‘소식’이 있는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그런 연락을 많이 받고 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사람의 '잘 지내지?' 라든가 '건강하지?' 같은 질문들.
좋은 소식은 물론 아니고, 내 친구는 슬픈 소식이라고 소주잔을 채웠지만 병의 입장에서는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일 테니 여전히 이렇게 대답한다.
'저야 뭐, 한결같죠.'
한동안 내 멋대로 ‘제법 안정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역시 삶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법이다.
환자라는 달갑잖은 명함을 단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달, 세 달, 일 년. 갓난아기가 자라듯 하루하루 컨디션이 달라지던 회복기를 지나 최근 몇 년간은
‘이 정도면 살만하지 않아?’
하는 생각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군데의 직장을 거쳐 자리를 잡고, 분에 넘치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있었다. 남들이 하는 건 거의 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냥 내 상태에 대해 자만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동안 병은 진행되었고 사실은 ‘모르는 게 약’인 상태. 지금은 다시 병원 어플의 예약 일정표에 ‘신경외과 수술‘ 항목이 추가되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큰 고통을 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꾸려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간혹 필요이상의 자기 연민이 찾아올 때는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일단 지금보다는 조금 더 힘들어질 예정이다.
뇌질환이 으레 그렇듯 나를 처음 만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얼마 전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사는 기분이라고. 그는 뇌졸중을 겪고 몇 년에 걸쳐 회복했다고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시한폭탄에는 타이머라도 달려 있지. 지뢰는 안 밟으면 안 터지기라도 하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삶을 하루 단위로 살아가는 것이다. 당장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도, 내일 아침엔 내가 하늘에 붕 뜬 유령이 되어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몸을 바라보며 ‘내가 죽었구나!‘ 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후회 없게.
그러니까 말하자면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살아가자. 이 마음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언제 갑자기 꺼질지 모르는 생을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래서 갑자기 울어버리기도 한다.
오랜만의 검사에서 영 좋지 못한 결과를 듣고서 지난 한 달 정도는 걷잡을 수 없는 우울감과 갑작스레 찾아오는 낙천적인 마음의 반복이었다. 그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만으로 심신이 지친 후에야 생각했다.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이나 뇌경색으로 죽는 것 자체보다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러니까 죽기 쉬운 불확실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사는 게 두려운 거야?
내 미래가 남들보다 좀 더 불확실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면 미래를 위하고 대비하는 모든 행위들이 부담스러워진다. 그것은 애초에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게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해서 지금을 사랑하는 게 어려워지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일들을 떠올려 보면 모두가 다 나름의 이유와 가치가 있었고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꽤 좋다. 나는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사랑해! 이건 중요한 느낌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도 그 덕에 지금을 밀도 있게 만끽하며 살다 보니 이런 사람이 되었다. 미래의 유한함에 정신을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반대로 유한한 생을 무한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병이다. 불확실한 시간을 착실히 주워서 제법 괜찮은 지금으로 만들자. 미래를 과거로 바꾸어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만큼 지금을 생각하면 사는 건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