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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경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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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색림 Feb 18. 2023

우물 밖 개구리

영국 옥스퍼드 연수 시절 (2014년 11월 - 12월) 

2014년 10월 31일 

43건을 11건으로까지 빼놓고

집에 와서 짐을 싸려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다들 부럽다고, 잘 놀다 오라고 한다

놀러가는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싶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후진국일수록 결과물에 대한 측정을 소홀히 한다는 점 때문에 교육파견을 그저 나라에서 해외여행 보내주는 것으로 인식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연수 후 연구보고서를 100장 내라고 양을 정해서 준다는 건 결국 안 읽어보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떻게 나랏돈으로 해외연수 보내고서 그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시스템도 없을까..

게다가 한국의 악습 중 하나는 일 하는 사람(=제일 나이 어린 사람)만 일을 다 하는 게 당연시되어서, 같이 가는 사람 중에 영어가 전혀 안 되는 사람도 나랏돈 들여서 보내주고 그 사람이 가서 놀건 관광만 하던 보고서만 나오면 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다들 그저 얹혀 갈 생각만 하는 게 아닐까..

애초에 그런 생각을 못하게 보다 엄격하게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정말 가면 세빠지게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너도나도 그저 가고 싶단 생각보다는, 어떤 연구를 해야 나라의 정책에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할 것 같다

이렇게 방만하게 연수가 운영되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은 우려를 표한다..


2014년 11월 2일 

도착 

코티지 주인분 넘 친절하시고 집도 참 이쁘다..

주변에 부엉이랑 토끼말고는 정말 아무도 없는 옥스퍼드 근교시골


2014년 11월 3일 

Oxford Martin School 

앞으로 두 달간 함께하게 될 창가의 내 자리와 

우리 룸메님들과

집 앞을 얼쩡거리는 새들


2014년 11월 4일

첫날부터 우리를 친절하고 따듯하게 반겨주는 모습들을 보고, 비록 저것이 가식일지라도 나중에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에게 저 정도로 따뜻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인들의 첫인상은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악명높은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도 요 며칠간은 맑게 갠 모습이었다

행정적인 사항들은 오늘 마무리지었고, 내일모레면 이곳 교수님, 연구원님과 NCA직원과의 첫 미팅이라 준비를 위해 공부를 하는데 

Oxford Martin School이 낸 보고서를 읽어보고 이 나라, 이 학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에 감탄하게 된다

자기네가 독수리 오형제도 아니면서 21세기의 지구를 구하려는 듯이 꼼꼼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분석하고 정책제안을 하는 걸 보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과 최고인 나라로서의 책임의식이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과거 수많은 식민지들에 대한 채무 의식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생의 예언대로, 내 발음은 영국화되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날라리영국풍 호주발음이 느끼발랄한 미국발음의 오염을 털어내고 또박또박한 영국발음인 척을 해서, 안 그래도 정체성을 잃은 나의 외국어 발음은 점점 국적불명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2014년 11월 5일 (1) 

Dag Hammarskjöld: "It is very easy to bow to the wish of a big power. It is another matter to resist it. If it is the wish of those nations who see the organization their best protection in the present world, I shall do so again."


2014년 11월 5일 (2) 

내일 미팅준비를 하면서 왜 이렇게 빡시게 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1. 자기 돈내고 공부하면 아까워서 열심히 할거면서, 국가 세금으로 돈내며 온 거면 적당히 하고 놀아도 된다는 말인지 궁금하다

2. 빡시게 해도 능력이 안 되서 부족한 게 많은데 적당히 하고 그저 놀러다니러 온 거면 세금 내는 국민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3.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낸 세금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고 어디에서 눈먼돈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관심이 별로 없다

4. 결국 크게 봤을 때 우리나라에 눈먼 돈이 많은 이유는, 국민들이 세금 사용처에 대해 정부에 책임을 묻거나 항의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고, 그걸 이유로 양심없는 공무원들이 놀고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5. 결론은? 우리나라 수준이 아직도 많이 낮다는거. 공무원들은 누가 쪼지 않는 이상 일 안하려고 한다는 거. 일하는 사람이 사서 고생하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거. 스트레스받아서 머리카락 많이 빠져서 대머리될까봐 걱정이라는 거. 그리고 그저 외국 바람쐬러 나온 사람의 현지가이드나 통역이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거. 놀거면 제 돈 내고 놀던가, 그럼 아까워서 열심히 놀겠지


2014년 11월 6일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정말로 연구를 할 마음이 있고 능력이 되는 사람들과 오고 싶다.. 그냥 겉멋으로 외국가고 싶다거나, 외국 나가서 있어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운다는 말은 게으르고 안일한 핑계일 뿐이고, 일은 결국 한 사람이 혼자 다 하게 되는 것을..

그래도 옥스퍼드 사람들이랑 펍에 가서 연구얘기도 하고 살아가는 얘기도 하는 건 퍽 재밌었다


2014년 11월 7일 

옥스퍼드에서 공부중인 친구 주은이랑 같이 금요일 저녁을 먹으며 영국사람들 이야기, 연구 이야기를 하면서, 확실히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좋은 교수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 시스템이 우수한 학교를 선택하는 게 진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사람들은 참 옷을 단정하고 예쁘게 입고 다닌다

말을 한마디 해도 꼭 미소를 띄고 다정하게 한다


2014년 11월 8일 

두 달간 지내게 된 Oxford Martin School 바로 옆에는 

1602년에 문을 연 Bodleian Library가 우뚝 서 있다

어제 나온 Academic Visitor 카드로 옥스퍼드 학생인 주은이랑 같이 공부를 하러 왔는데

굉장히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 현대식 조명을 갖추고 

위인들의 초상화와 옛날 책들과 옥스퍼드 학생들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퍽 신비롭다

며칠동안 미팅때까지 스트레스받으면서 투덜거렸지만

이런 곳에서 두 달 지내게 된 게 굉장히 큰 행운인 것 같다

목요일 미팅은 생각보다 큰 무리 없이 잘 된 것 같다

세계 일류 학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 때문에 부담되고 스트레스받아서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이러다 대머리가 되는 게 아닌가 했는데 막상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연습 때보다 훨씬 매끄럽게 전달이 된 것 같다 

Ian Brown 교수님이 "Sensible"하다며 연구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들과

더 나은 연구를 하기 위한 우선순위를 속사포처럼 쏘아주셨고 

그 빠르게 쏘아대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받아적느라 진땀을 뺐다

사실 우리가 하는 연구가 이곳 센터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연구주제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Ian은 오히려 우리의 연구가 자신들의 연구와 관련이 되어 있고 나중에 Best Practice로 언급할 수 있다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했다

극동지역의 작은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와서 이런 연구를 하겠다고 하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줄 수 있는 도움을 다 주겠다고 하는 게 참 고맙게 느껴진다

목요일 저녁엔 센터 사람들과 이곳에서 1600년대에 문을 연 The Lamb and Flag pub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 Taylor 랑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몰타에서 온 Knowledge exchange manager 인 Lara라는 멋진 여자랑 이야기하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


2014년 11월 10일 (1) 

"An idea that is not dangerous is unworthy of being called an idea at all"

-Oscar Wilde-


2014년 11월 10일 (2) 

오후 네 시도 채 안됐는데 벌써 해가 졌다..

도서관에서 police reform에 대한 책을 빌리려 했는데 도서관 내 열람만 가능한 책이어서 찾아보니 런던에 있는 서점에 딱 한 권 재고가 있어 바로드림서비스 비슷한 걸로 일단 사두고 런던 가는 길.. 버스비가 왕복 11파운드인데.. 얘넨 왤케 물가가 비싸니..


2014년 11월 10일 (3) 

매운 떡볶이랑 닭강정 먹고싶다.................


2014년 11월 11일 

"His faith gave him what might, at first, look like a veneer of naivety, especially when coping with the Met's ferocious office politics."

"Williamson's rise through the ranks was steady, if not spectacular: an inspector by 1982, he was promoted to commander in 1989. At each level, however, his influence far outstripped his nominal place in the hierarchy. By the mid-1980s, he was identified as a key member of what some termed the Met's "progessive tendency", a cadre of then middle-ranking officers who were convinced that in order to survive, British policing had to transform itself from within."

-Guardian Obituary: Tom Williamson, police reformer-


2014년 11월 12일 

당연한 것을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끝까지 잘 싸워주셨으면 좋겠다. 멋진 사람.

"임은정 검사는 지난 8월 18일 항소심 결심 기일에 법정에서 최후 진술에서 “검사는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해야 한다”며 “검사는 검찰과 국가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의 정의에 대한 의지를 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검사의 소신과 기개가 묻어있는 대목이다.

임 검사는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한다”고 밝혔다.

임 검사는 그러면서 “제가 배운 ‘검사’는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국가기관으로, 정의에 대한 국가의지의 상징”이라며 “저는 검사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 징계를 받아 이 자리에 선 현실이 참으로 서글픕니다. 준사법기관으로, 단독관청으로서 검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본문 중-


2014년 11월 13일 (1)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 벼랑 끝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장부의 기상이로다!

-백범일지 중-


2014년 11월 13일 (2) 

진심으로 떡볶이랑 닭강정이랑 닭갈비랑 양념치킨이랑 돼지껍데기랑 부대찌개랑 치즈라볶이랑 불닭볶음면 먹고 싶다....................... 여기 음식이랑 날씨는 최악인듯 ㅠ


2014년 11월 16일 (1) 

You want to know how I did it? This is how I did it, Anton: I never saved anything for the swim back.

-Vincent, <Gattaca(1997)>-


2014년 11월 16일 (2) 

친구 주은이를 통해 전해듣는 옥스포드 교수들의 실력과 열정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나는 내가 오래 살거나 출세하거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짧은 시간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뛰어난 실력과 대단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

그러면 참 행복한 인생일 것 같다


2014년 11월 16일 (3) 

그냥 다 때려칠까..

총체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열정과 실력이 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2014년 11월 16일 (4) 

얘네는 벌써 저만치 앞서나간 지 한참 됐는데,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선진'적이라며 개도국에게 '선진치안인프라'를 구축해 주겠댄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남들이 이미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국민 세금을 주먹구구식으로 함부로 써대면서 일 열심히 했다고 아우성이다

정말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고 선진적이고 싶었다면

이렇게 부끄러운 짓은 안 했을거다

쪽팔려서 정말 여기 있기가 싫다.. 그냥 집에 가서 자고 싶다


2014년 11월 17일 

아..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싶다.. 

끼니 찾아먹기 귀찮기도 하고 맛도 없어서 하루에 두 끼 먹는데 그중 꼭 한 끼는 샌드위치다

사실 여기서 가격 만만하고 맛도 괜찮은 건 그것밖에 없다..

그치만 한국 가선 한동안 쳐다도 안 볼 거다.. 샌드위치는 정말 꼴도 보기 싫다 ㅠ 

어떻게 옥스포드엔 닭갈비집이 없을까 ㅠ 

하나 차릴까..


2014년 11월 19일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무사안일만 원하면서 승진공부만 하고 줄 잘 서서 소위 '잘 나가는' 자리만 찾아다니는 보신주의. 

대개의 경우 진짜 경찰관이 가져야 할 자질인 유능하고, 용감하고, 책임감 강하고, 자기희생적인 자질과 정확히 반대되는 자질을 가져야만 경찰조직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구조.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서 권한을 휘두르고 싶어할 뿐, 정말 그런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거나 공부를 많이 하기보다는, 여기저기 얼굴 내밀고 이력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일들만 찾아서 한다.

 민주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조직에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으로 찍혀서 승진하기 어려워진다. 그저 남들 하는 것처럼, 일 적당히 하고 적당한 시기에 본청에 들어가고 줄 잘 서고 빽써서 좋은 자리 가는 게 대세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조직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건 간신배나 하는 짓거리고, 진짜 걱정이 되어 자신의 신분상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문제점을 들추고 비판을 해서 개선을 하려는 노력이 더 '충성'스러운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상한건가? 

어차피 자기가 있던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 따위 없다. 하던 일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승진공부 열심히 해서 다른 자리 가면 끝이니까, 뭘 머리아프게 고민하나. 

경찰관이 경찰관답지 않아야 승진을 하고, 일하기보다는 승진공부에 매진해야만 승진하고, 일만 하는 사람은 그냥 지 꺼 못챙겨먹는 병신이 되어버리는 게 정상적인 회사인지 의문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면서 왜 이런 건 정상화시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반성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척하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다. 

경찰관은 경찰관다워야 한다. 그런데 가만 보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경찰이 아니라 나쁜 의미의 '관료'가 되어 아무 생각없이, 문제의식없이, 고민없이 정권이나 언론의 눈치만 보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한국을 떠나 있으니 이곳과 한국의 현실이 더 선명하게 비교되어 서글프다.


2014년 11월 20일 

아무것도 하기 싫다...

어제 센터 Erwin 박사님이랑 한 미팅은 정말 내용도 괜찮았고

박사님이 내가 찾아 준 자료랑 어제 했던 논의가 고맙다고 초콜릿까지 갖다주러 오셨는데도

기분이 그냥 별로다.. 분명 어제 했던 질문들과 토론 참 재밌었는데.. 

격하게 분노하고 좌절하는 건 삼가야지 하다가도

배우고 알면 알수록 화가 치밀고 고민하다 지치고 하는 것 같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혐오해서, 스스로가 힘들어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몰고가는 게

결국은 내가 나를 못살게 구는 것 같다

창 밖을 보면서 멍때리며 주절주절..


2014년 11월 25일 

하루종일 떠들고 피티를 세 개나 연속으로 해서 

슈니첼 먹을 땐 엄청 지치고 피곤했는데

막상 자려고 누우니 잠이 안 온다..

곱씹을수록 오늘 UNODC 사람들과 했던 회의에서 잘한 부분보다는 내가 보인 빈틈만 보여서 계속 부끄럽고 쪽팔려서 숨고만 싶다.. 

언제쯤 잘 할 수 있을까? 

오늘 배운 걸 어떻게 실제로 활용할 수 있을까?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지식의 크기는 무한정 줄어들기만 한다..

잠이 안 온다


2014년 11월 26일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닌,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현 체제에 잘못이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체제에 부응하며 근면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결국 잘못된 체제를 강화하는 악이 되는 게 아닌가. 일상에서의 타협과 체제에 대한 순응이 사회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지 성찰하며 살기보다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해야 한다며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역겹고 정나미떨어진다.


2014년 11월 29일 

현실이 싫으니 몸이 계속 깨어있길 거부하고 그냥 잠들라고 하는 것 같다

이 미친 현실에서 같이 미쳐버리지 않고 맨정신으로 나를 지키며 깨어있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 같다

다들 외국 한번 나가보는 것만 부러워하고 바랄 뿐, 실제로 자신이 외국에 나와서 한국경찰을 대표하며 일할 능력이 되는지 걱정하는 사람은 잘 없다

자기 능력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나갔다오면 자기 이력에 한 줄 추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이야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어차피 제대로 점검도 안 하는데 그냥 적당히 명함 돌리고 오면 뭔가 일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뭐..

하긴 그렇게 따지면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언제 누가 승진하는 데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자질이 되는지 고민하고 따지길 했나.. 자기 능력이 되든 안 되든 시험문제만 잘 풀면 승진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그냥 쓰레기 같다 

혼자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도 지겹고 지친다


2014년 12월 3일 (1) 

대학 연구기관에 잠깐이나마 소속되어 있어 좋은 점이라면

수많은 학술저널에 무제한적인 접속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학위는 하기 싫은데 연구는 하고 싶고 

이 접속권만 따로 사려면 엄청나게 비싸겠지...? ㅠㅠ


2014년 12월 3일 (2) 

쑨옌즈의 노래와 중국어의 매력에 빠져 남들 내신 챙기고 수능공부할 고등학교 시절 중국어 교과서만 달달 외웠던 것처럼

쉼보르스카의 시를 제대로 읽고 싶어서 폴란드어가 배우고 싶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이해하고 싶어서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

모국어를 사용하니 당연한 거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영어를 너무나 아름답고 정중하고 재치있게 쓴다..


2014년 12월 4일 

몸이 으슬으슬하고 자도 자도 졸린 게 드디어 몸살이 난 게 틀림없다.. 그동안 좀 무리를 하긴 했나보다

집에 일찍 와서 두시부터 네시까지 잤는데 또 졸리네

그나마 12월 한달 살기로 한 옥스퍼드 시내 근처 헤딩턴의 이 집은 참 따뜻하고 포근해서 좋다. 영국 기준에선 조금, 한국 기준으로는 매우 비싸지만 다음에 옥스퍼드에 한두 달 묵게 된다면 여기서 또 묵고 싶다


2014년 12월 6일 

오랜만에 날씨가 너무 좋아 한복입고 대영박물관 가는 길

날씨가 좋아서 기분은 좋지만.. 여기 음식이 맛없고 딱히 안챙겨먹다보니 살 빠지는 것도 그렇지만 몸살과는 별개로 계속 졸리고 9시간씩 자도 또 졸리다.. 하루 두 끼씩, 샌드위치떼기나 바나나를 먹고 제대로 된 밥을 안 먹다보니 체력이 바닥나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영국에 유학오는 게 로망이었는데, 이번 경험을 계기로 그럴 가능성은 낮아진 듯. 학문적, 정치적 시스템은 참으로 수준 높고 배울 점이 많지만 이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자료를 찾아볼 수 있을 뿐더러, 요리도 귀찮아하고 뭐 챙겨먹기보다 사먹는 걸 선호하는 나에게 영국은 굉장히 척박한 곳이다..


2014년 12월 11일 (1) 

알고 보면 세상은 정말 넓고 할 일은 너무 많다...


You really can change the world if you care enough.

– Marian Wright Edelman


You never change things by fighting the existing reality. To change something, build a new model that makes the existing model obsolete.

 – Richard Buckminster Fuller


“First they ignore you, then they laugh at you, then they fight you, then you win.”

-Gandhi


2014년 12월 11일 (2) 

구성직업전문학교(모교) 존폐론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이 학교가 도대체 왜 있는가' 에 대한 답과

'이 학교가 왜 있어야 하는가' 에 대한 답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져버린 게 문제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옥스퍼드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새벽 두 시 넘어서도 잠 못 들고 배는 고프니 별생각을 다 한다)

선배들을 보고 동기들을 보고 후배들을 봐도

정말 극소수만 '경찰'이고

나머지는 그저 무늬만 경찰인 관료 또는 그런 관료가 되고자 하는 게 대부분이다

경찰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상사가 던져주는 일 잘 처리하고 말 잘 듣고 보고서 잘 치면 훌륭한 경찰관이고 좋은 자리에 찾아갈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는 현 체제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 다들 남들의 이목과 자신의 평판에 혹시라도 해가 될새라 입을 닫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Police Reform: Forces for Change 라는 책에서도 영국 경찰의 개혁 동력 중 하나가 바로 현 체제에 대해 현직 경찰관들이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토양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잘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비주류, 마이너, 이상한 애 되기 십상이지만 나는 어차피 셋 중 둘 이상은 해당되는 것 같으니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간디도 변화를 이끄는 소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처음엔 무시하고, 그 다음엔 비웃고, 그 다음엔 싸우다가 결국에는 변화가 승리한다 했으니 이 풍토도 점차 바뀌리라 기대해본다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면 더욱 표현을 해야 조금이라도 그것이 자유이며 기본권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자고 싶은데 생각이 나를 괴롭혀 잠 못 드는 밤..


2014년 12월 11일 (3) 

You do not necessarily need to be constrained by existing policies. They can sometimes be changed if you show a good reason for doing so. 

-'Psychology of Intelligence Analysis', p. 80-


2014년 12월 13일 

땅콩항공 사건으로 인해 전세계가 한국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매우 부끄럽지만 이렇게 세계언론에 오르내리다 보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한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해가지 않을까 싶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내부에서 문제제기 하는 사람이 삐딱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판인데, 앞으로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으면 국제사회에 한국의 문제점을 계속 알려 국제사회의 압력을 통해 한국을 변화시키는 게 빠를 거다


2014년 12월 14일 (1) 

우리나라는 진짜 역동적인 것 같다

하루도 어수선하지 않은 날 없이 좌충우돌이네


2014년 12월 14일 (2) 

"I wish it need not have happened in my time," said Frodo.

"So do I," said Gandalf, "and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All we have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us."

-J. R. R. Tolkien, <The Fellowship of the Ring>-


2014년 12월 15일 (1) 

ITU National Cybersecurity Strategy Guide   

굉장히 복합적인 분야라 그런지 이제는 국제기구들끼리 경쟁을 하는 양상인 것 같다

UNODC와 Interpol도 서로 정보공유를 잘 안하려는 것 같고 

문서들은 쏟아져 나오고 겹치는 것도 많고 서로 initiative를 가져가려 애를 쓰는 듯


2014년 12월 15일 (2) 

"It's like in the great stories, Mr. Frodo. The ones that really mattered. Full of darkness and danger they were. And sometimes you didn't want to know the end… because how could the end be happy? How could the world go back to the way it was when so much bad had happened? But in the end, it’s only a passing thing… this shadow. Even darkness must pass."

-Sam Gamgee, <The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2014년 12월 18일 

'남들 하는 만큼만 해야지' 하는 사람은 정말 매력없다 

꼭 보면 그런사람들은 남들 하는 만큼도 못한다 

남들이 뭐라하건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이 매력적이다


2014년 12월 20일 

실제로 일을 정말 제대로 잘하려고 하는 사람은 소수고, 현실의 대다수는 실제로 일을 잘 못하면서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포장'을 잘해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어한다 

정말 쓸데없는 것에 쏟는 열정과 정성의 반만이라도 실제 일에 투자했으면 좋겠다


2014년 12월 22일 

아니 날씨 한번 폭풍의언덕스럽네...

얼른 집에 가고프다.. 추워도 좋아 비바람만 안 불면..


2014년 12월 25일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포기가 쉽고 수용이 빠르다

목숨걸고 독립운동하고 압제자에게 항거한 사람들,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소수를 빼고는 이름도 잊혀진 채 죽어갔기 때문에 

열강들 사이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가 봐도 명백히 뭔가가 잘못되었다면 

그걸 나서서 이야기해야 사회가 발전하는데

우리 사이에 팽배한 분위기는 '어차피 말해도 안 듣는다, 너만 손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이기에

힘 있는 자가 농단을 부려도 멍청하게 가만히 있는다

남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은 노예나 하는 짓이다 

앞사람들이 피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누리면서 

노예처럼 사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NCA CEOP에서 아동음란물 수사를 맡은 경찰관은

기존 법률체계의 처벌조항 미비에 대해서 

'이건 말도 안 된다, 처벌조항을 만들어라'라고

수년간 요구한 끝에 법개정까지 이끌어냈고 

그걸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줬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일개 경찰관이 뭘 알아'하고 무시하고 끝났을 것이다

경찰관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우리가 그걸 묵인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듣지 않으려는 자들을 설득시키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존중받는 사회가 된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콩도르세가 말했는데

우리는 정반대로 조용히 말 잘 듣는 멍청한 순한 양을 길러내는 것 같다

세월호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대부분

'가만히 있으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었고

크리스마스가 된 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고 슬픔에 잠기게 한 이 사건도

조용히 잊혀져 가는 느낌이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추운 옥스퍼드의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생각은 여지없이 한국으로 향하는 걸 보니 난 영락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아 짐싸기 너무 어렵다........ㅠㅠ


2014년 12월 27일 

길고도 짧은 57일간의 옥스퍼드 체류 끝

비행기타고 와서 내리자마자 모던韓과 송화한복에서 주최한 한복패션쇼에 갔더랬다

나는 모델몸매도 얼굴도 아니지만 송화 단골고객이라 한복모델을 난생처음 해봤다..

메이크업 해주시는 분들이 전혀 다듬지 않은 내 눈썹땜에 애를 먹으신 것 같았다.. 

갓을 써봤더니 반응이 좋아서 갓을 삐딱하게 쓰고 실실 웃으면서 워킹을 했는데 재밌었다 ㅋㅋ

한복패션쇼 사진은 나중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연수였다

진짜 가셨어야 하실 분들(김기범교수님, 송영진언니, 폰으로 태그안되시는 장교수님과 홍성진선배님)의 unavailability로 인해 얼떨결에 가게 된 연수, 그래도 잘 하고 싶어서 혼자서만 야단법석을 떤 것 같기도 하고.. 열정이 많은 팀이었으면 정말  재밌었을 것 같다. 혼자서 분투하는데 옆에서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여행과 쇼핑과 영국경제활성화에만 관심있으면 되게 김새고 힘빠지는 걸 많이 느꼈다 

(이젠 영어못하는 공무원도 해외연수 보낸다는데 더 그러겠지.. 이건 근데 정말 행자부에서 다시 생각할 문제다. 소통도 안 되는 사람 보내서 뭘 한다는 건지.. 그보다 한국 수준을 더 낮게 보는 국제적 인식이 생기는데 이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반드시 내외부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문제제기를 할 생각이다. 영어가 조금 되어도 제대로 하려면 힘이 무진장 드는데, 영어로 된 자료 읽기도 싫어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보낸다는 건 그냥 세금 낭비하겠다는 소리다. 우리나라는 돈 진짜 많은가보다)

옥스퍼드 GCSCC, UNODC, NCA를 방문할 때도 준비안된 상태로 놀러온 개도국 공무원으로 비춰지기 너무 싫어서 밤새서 공부하고 피피티 준비하고 미팅 때 토론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운 건 그나마 아쉬운 중 보람된 일이지만,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기엔 일선 수사관으로서의 내 위치때문에 한계를 많이 느꼈다

그래도 친구 주은이랑 보들리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 기숙사에서 떡볶이 해 먹고, 어윈이랑 마리아랑 펍에서 술취해서 떠들고 놀고, 런던에서 프랑스 친구 토마스랑 비 쫄딱 맞아가며 런던구경한 건 정말 길이길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또 여기서 연구자료를 보며 나의 무식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정말 많이 배우던 중 도서관에서 만난 Police Reform: Forces for Change라는 책을 읽으며 감동의 밑줄긋기도 했다.. 이 책은 정말 저자한테 이메일보내서 번역해도 되냐고 물어볼 생각이다

내일부턴 다시 본업으로! 팀장님이 웰컴백 선물로 진상 고소인을 벌써 내 사건으로 받아두셨다고 하니 내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해야겠다 �


2014년 12월 29일

소통 없는 소신은 고통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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