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글을 쓰지 못한 이유, 그전에 글을 썼던 이유
말과 글로 밥 빌어먹고 살던 직업을 때려치운 지 반년 만에 키보드를 잡았다.
취재보도는 2020년 이후로 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린 것도 2년 전이다. 업무상 해야 하는 뉴스레터 소개글, 웹사이트 공지글, 이메일, 그리고 가끔 내킬 때 일기장에 쓴 일기 말고는 공개된 글을 쓰는 걸 피했다.
누가 내 글을 목을 빼고 기다린 것도 아니지만, 무슨 거창한 이유로 절필을 선언한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젠가부터 글이 써지지 않았고, 깜빡이는 커서가 무섭기만 했다.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로 글쓰기를 두려워했다.
이렇게 무서운 글쓰기를 업으로 삼다니.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글밥을 먹을 생각을 했지? 예전에 내가 쓴 글들을 뒤적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글을 쏟아내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기자가 되리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던 시절, 글쓰기는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구석이자 분노를 해소하는 창구였다. 부당한 지시사항, 앞뒤가 맞지 않는 의사결정,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수뇌부의 태도에 맞서고 싶었던 이십 대의 어린 나에게 글의 위력은 매력적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은 일들을 보고 겪은 후 그 일들을 기록했고 나의 의견을 덧붙여 게시했다. 여론의 눈치를 보고 정권에 굽신거리는 수뇌부를 관찰한 결과, 내가 조직을 바꾸고 싶다면 조직 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며 수없는 불의와의 타협을 하기보다 공개적인 글쓰기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글쓰기로 내가 한없이 사랑한 조직을 바꿔놓으리란 순진하고도 다부진 꿈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 철없는 꿈은 물론 금방 산산조각 났다. 초임기자로 기사작성방법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국제협력 업무를 해본 경력과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국내 취재보다는 국제 취재 프로젝트에 우선적으로 동원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취재보다는 뉴스룸에서 우선순위로 지정한 아이템을 해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쳐내고 주말에 출근해도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아이템을 하려면 그나마 있는 개인 휴식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입사할 때 나의 채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일을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운동시간을 포기했고,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 건 뒷전이었다. 집에 있는 냉장고에는 생수밖에 없는 날이 허다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퇴근하기를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일을 해서 얻은 결과는 알량한 인정과 망가진 몸,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마음이었다.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이 바뀌었단 확신, 바뀔 거란 믿음이 내 몸과 마음이 하는 고생의 크기에 비해 하염없이 작기만 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글만 잘 쓴다고 썩은 조직을 개혁할 수 있었다면, 글솜씨로 관리를 뽑았던 조선왕조가 망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사그라들었다. 사표를 내고 뉴스룸을 떠났다. 접어두었던 브런치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에 대한 원고청탁도 받아 프리랜서 자격으로 글도 팔아먹어 보았다. 한동안은 지역 주간지 기자 생활을 해보기도 했는데, 정부 보조금을 타내려고 약간의 편법을 쓰려던 상사와의 의견충돌을 해결하지 못해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사표를 냈다. (물론 후임을 찾기 전까지 일을 해주기로 하고 그 후 5주일 더 기사를 써주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에 우연이 겹쳐 미국에 본사를 둔 조직에 입사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을 테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다시 글로 밥벌이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물론 큰 차이가 있었다. 원어민이 아닌 내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밥벌이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입사 후의 글쓰기 난이도는 차원이 달랐다. 차라리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영어로 다루는 일이었다면 좀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모국어로 글을 쓸 때에도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이 보여 주눅이 들었는데, 영어 원어민 중에서도 말과 글을 잘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과 글로 밥을 벌어먹는 게,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너무 외롭고 고달팠다. 에디터 중 나는 나이가 가장 어렸고 유일한 외국인, 유일한 유색인종 여성이었다. 남들은 삼십 분 만에 후딱 써내는 뉴스레터 헤더를 나는 여섯 시간 동안 붙잡고 있을 때도 있었다. 못한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혹독하게 굴었다.
4년 간 그곳에서 영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많았다. 업무시간 내내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다 보니 가끔 한국어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자기 학대를 일삼던 나는 옳다구나, 한 것 같다. 와, 이제는 모국어도 못하네. 어중간한 영어로 에디터 행세를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언젠가 발각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감에 초조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거기다 모국어조차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존재가 되어버린 내가 너무나 초라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다 보니 내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결과가 좋고 주변에서 칭찬을 해줘도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의 생각을 내가 앞장서서 비하하고 있었으니 내 의견을 남들에게 피력하는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항상 나의 반대편에 서서 나를 쥐어패고 있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나 자신을 들볶으며 가스라이팅을 일삼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나의 가장 큰 적은 나였다.
애초에 나에게 글쓰기의 재미를 느끼게 해 줬던 분노는 세상의 모든 부당함과 불의함을 향한 것이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못한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영어를 한다는 이유로 다른 일에 투입되면서 나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취재를 하지 못했다. 목표물에 정조준하지 못한 분노라는 원동력을 스스로에게 쏟아부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취재를 할 수 있었더라면 계속 한국에서 기사를 썼을까? 내가 남들만큼 끈기가 더 있었더라면, 취재력이 더 뛰어났더라면 내가 꿈꿨던 것처럼 조직개혁의 도화선이 되는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을 버렸더라면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일하면서도 자기 학대를 덜 했을까?
기자가 되기 직전이었나, 아니면 기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나. 당시 나는 경찰을 그만두었다는 해방감과 중간에 포기해 버렸다는 마음의 빚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기자가 되어 좋은 기사로 그 마음의 빚을 갚을 거란 막연한 희망 덕분에 그나마 나만의 관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뉴스룸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던 겨울엔 그런 막연한 희망 또한 사라진 후였다. 최근까지 일하던 회사를 그만둘 무렵에는 언론의 한계에 대한 실망과 업계 관행에 대한 환멸,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독처럼 온몸에 퍼져 뉴스를 읽을 힘도, 내 생각을 표현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글쓰기를 멈추고 뉴스를 끊고 살았다. 뉴스의 홍수 속에 머리까지 잠긴 채로 살다가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돌보며 지난 몇 달을 보냈다. 일어나자마자 강아지들 밥을 챙기고 운동을 하고 집밥 해 먹는 횟수를 늘렸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고 듣지 않아도 나의 일상은 흘러간다는 게 신기하면서 감사했다. 몸이 회복되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나의 마음에 재갈을 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의 알 권리, 공익,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대의명분이 기자로서, 에디터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과 공모하여 나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몰아치기 바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만의 관점을 잃어버린 채 항상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검열했다. 내가 나를 아끼지 않았으니 나만의 관점을 감히 글로 표현할 용기도 낼 수 없게 됐다. 글을 쓰지 않다 보니 생각이 파편화되어 더더욱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쓸 수 없는 마비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검열의 늪을 막 헤어 나온 지금에서야 내가 늪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고생이 소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가 나를 학대하며 나의 관점을 잃어버린 채 불안에 떨며 산 덕분에(?) 얻은 소득도 있다. 6년 전 뉴스룸을 나올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퇴사의 변'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내가 느낀 것은, 사유와의 피드백 과정이 빠진 관찰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보더라도, 만약 그것이 충분한 사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초인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초인적으로 보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초인적인 눈으로 본 것을 평범한 것으로 판단하여 그것으로 정신적인 처리를 끝냈다고 결론짓는 것이며, 이미 본 것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보다 많은 것을 보려고만 하게 되어, 초인적인 눈으로 보았다고 여기지만 결국 평범한 눈으로 본 것에 불과한 결과로 나타나고 만다. 그리고 저널리스트는 초인적인 시각의 소유자라는 환상 아래 독자를 현혹하고 모든 사람들을 만성적인 정보 과다증에 빠뜨려서, 보았다고는 하나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고 들었다고는 하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들었다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봄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잃어버린 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만 보려고 한다면, 보았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결과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나를 엄습해 오고, 점점 물리적으로 보는 것에만 열중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적으로 보는 것에 완전히 길들여져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보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지금은 조금 덜 보기로 결심하였다."
- 다치바나 다카시, '퇴사의 변' 중에서. 1966.10.12. <문예춘추> 사원회보 -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겪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평가에만 의존하며 내가 소멸될 뻔하지 않았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명문장을 이제는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며 살아야 할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꾸준히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가장 아끼며 살아야겠다. 타인의 기준과 기대치에 길들여진 삶을 살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