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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연 Jun 30. 2021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아무 의미 없는 생각하기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많은 잡문집 중 하나이다. 별 내용 없는 잡문을 좋아해서 여러 작가의 잡문집을 찾아 읽는데, 무라카미는 특히나 잡문집 수필집을 꾸준히 내는 사람이라 여러 권을 읽게 되었다. 책 제목을 통해 예상할 수 있듯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생각들을 굳이 글로 적어서 모아놓은 책이다. 분명 책은 재밌게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생각들 아닐까. 최근엔 길어지는 취준생활로 생각의 폭도 좁아지고, 다양한 형태의 컨텐츠들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감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책을 거의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은 예외적으로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몇 편의 글들에서는 하루키스러운 낡은 성 인식이 드러나 불편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책이 쭉쭉 읽히는 느낌을 받고 즐거웠으니, 별 내용 없는 책도 세상에 필요할 수 있는 듯하다. 


책의 뉘앙스를 설명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비슷한 분위기로 글을 써보았다.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말하지 않고 영수증을 받지 않는 방법


우연히 ‘영수증은 버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갑질이라는 내용의 인터넷 글을 읽었다. 본인의 영수증을 남에게 버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직원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참 별걸 다..’ 라는 생각으로 스크롤을 쭉쭉 내리는데, 몇십 개의 댓글이 다 본문의 내용에 동의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전까지 그런 말을 했던 본인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엔 나도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버려주세요’ 보다는 ‘버려주시겠어요?’라고 말해야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상황을 피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댓글 중 “당해보면 저 말하는 사람 진짜 싫어요.  몇 걸음 가서  쓰레기통 있잖아요 본인이 직접 해야죠”라고 쓰신 분의 하루를 잡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의 어미를 바꿔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댄디한 스타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멘트를 사용하여 영수증을 거부해봤다. “혹시 영수증은 버려주실 수 있을까요?", “영수증 안 받아도 되는 걸까요?”, “쓰레기통이 멀지 않으시다면 영수증을 버려주시겠어요?” 몇 번을 이런 식으로 정중한 멘트들을 해본 결과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스스로가 너무 어색한 것이다! 카드를 내밀 때는 분명 나답고 자연스럽지만 영수증 멘트를 할 때는 갑자기 내가 너무 굽신거린다거나, 준비된 의미심장한 멘트를 하는 것 같다거나 그런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가끔은 영수증을 건네주려던 직원도 내 멘트를 듣고 ‘지금 이 사람이 뭐 중요한 말 한 건가..?’ 싶은 표정으로 눈을 땡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뭐라구요?” 라고 되묻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는 정말 두 배는 더 굽신거리며 영수증 좀 버려달라는 말을 구구절절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고민하게 된 게 자연스럽게 별말 안 하면서, 상대방의 기분 또한 잡치게 하지 않고 영수증을 안 받는 방법이다. 첫 번째는 외국인인척하는 것이다. 직원이 영수증과 카드를 함께 건네주면 어깨를 으쓱하며 “sorry.. but..” 라고 말하며 카드만 쏙 빼가는 것이다. 마치 영수증은 원래 주지 않는 문화권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영수증을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만 받으면 된다. 아마 직원도 ‘아 영수증이 뭔지 모르나..? 이건 딱히 가져갈 필요도 없고 중요한 건 아니라고 영어로 설명해줘야하나..?’ 라고 고민하다 ‘에이 그냥 내가 버려줘야지’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외국인 간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두 번째는 약간 과격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집에 쌓여있는 영수증을 챙겨놨다가 직원이 계산을 해주는 동안 보는 앞에서 준비한 영수증을 북북 찢는 것이다. 마치 ‘이놈의 영수증은 어떻게 주머니마다 들어있어서 이렇게 짜증나게 하냐’ 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뭐 한숨까지 푹푹 쉬며 영수증을 찢으면 직원 역시 괜시리 짜증 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무덤덤하게 찢는 게 중요하다. ‘아 이놈의 영수증이 또 나왔네..’ 북북…  이런 행동을 본다면 직원의 입장에서는 영수증을 받는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되고, 대게는 “영수증은 버려드릴까요?” 라는 고마운 말을 해준다. 직원이 버려주겠다는 말을 한다면 “앗 감사합니다!” 라고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이 방식은 왠진 모르겠지만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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