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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구름 Nov 10. 2024

지구인들의 옷과 일상

다큐 낡은 것들의 힘




라이크라 레깅스를 입고 일찍 가서 앞줄에 서려고 했어요. 엔도르핀이 분출하면 엄청나게 신나고 그 자체가 항우울제가 되죠. 당시의 웃기고 실없던 것들이 너무 그리워요. 에어로빅은 기본적으로 아주 값싼 취향이지만 그런 것들이 재밌잖아요.       



이 다큐멘터리는 8가지 주제(공동체, 상실, 시작, 성장, 유니폼, 기회, 생존, 사랑)로 옷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애초부터 그 자신 말고는 전혀 관심 없을지도 모를 개인적 기억과 의미. 사람들이 내어놓는 이야길 듣고 있노라면, 익명의 옷더미들이 생생하게 숨을 쉬는 존재처럼 달리 보인다.       



사이즈가 없어 가슴 축소술을 받아야 했던 이에게 옷이란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하는 감옥이다. 반대로 또 어떤 이에게는 억압되었던 자신을 해방시키는 간절함이다. 옷이 감옥이었던 이는 옷을 입지 않고 생활하는 나체주의 공동체를 만나고, 옷이 해방이었던 이는 TV토크쇼에 자신을 드러낸 후 새로운 이웃들과 연결된다. 갈 곳 없이 떠돌던 마음을 내려놓고 마침내 안도한다.      



저희를 본 또래 젊은이들이 뉴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요. 우리처럼 입고서요. 자라면서 억압받았거나 자기 삶을 거부당한 사람이 자기를 축복하고 좋아해 줄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 큰 짐을 던 기분이에요.





재봉사였던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해 남편과 자식, 형제들을 먹이고 재웠다. 할머니가 자투리 실크로 만들어주곤 했던 넥타이는 가족들에게 사랑의 상징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허리케인으로 아버지의 집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차마 보기 힘들어 애써 외면하고 싶은데, 참혹한 잔해의 한가운데 빨간 넥타이가 홀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녀가 아직까지도 집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넥타이 때문에 정말 행복해요. 할머니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걸 매면 집의 일부를 달고 있는 것 같고요."



상실의 자리는 한 존재에 관한 것일 수도, 나의 모습이나 어떤 시절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낡은 것들을 천천히 더듬어보는 일은 내가 분명 그 시간을 살았고, 지금도 내 안에 그날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다.      



어떤 옷을 입어왔나, 어떤 옷이 소중한가, 어떤 옷을 오래 간직하고 있나. 나에게 옷이란 그저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할 뿐인 소모품이었다. 불현듯 꽤 오랜 시간 착용 중인 사소한 머리핀 하나가 떠오른다. 20대 초 미용실에서 우연히 얻은 파란색 머리핀.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는 흔한 모습인데, 20년 가까이 매일 저녁 내 앞머리에 붙어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애정이 생긴다. 이게 바로 길들여진다는 것일까, 꿋꿋이 살아남은 머리핀을 보며 어쩐지 웃기면서도 위안이 되는 건 왜인지. 언젠가, 녹슬거나 칠이 벗겨진 몸으로 내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몫으로 남겨 둘 일이다.



길들여져버린 애착 머리핀


  

   

옷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요?      







낡은 것들의 힘(Worn stories, 2021) / 다큐멘터리 / 미국 / JENJI K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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