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도매 브랜드는 상당히 두려운 곳이었다. 동대문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는데 옷을 판매하는 업체나 관계자가 아닌 이상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설령 판매자인 척하면서 용기를 내어 간다고 해도 최소 색깔별로 한 장씩 구매해야 거래가 가능하다는 말을 접하기도 했다. 밀리오레, apm 같은 소매처에서도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며 절대 할인을 허락해주지 않던 상점 언니들의 기억이 생생하기에 나와는 영영 접점이 없을 것 같던 그 도매처들. 하지만 아무나 범접할 수 없기에 더욱 호기심이 이는 곳이기도 했던 것 같다.
달에도 여러 벌의 옷을 구입하고 되팔고를 반복하다 보니 새로 알게 되는 브랜드들이 넘쳐난다. 특히 브랜드를 발견하는 가장 많은 경우가 온라인 중고마켓으로 의류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내가 관심 있는 브랜드명으로 상품을 검색하다 보면 내가 찾는 브랜드가 아니어도 꽤나 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제품들이 눈에 띄는데, 그 판매처들의 이름이 항상 비슷하거나 반복됐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옷을 판매하는 곳인지'가 궁금해 브랜드를 탐색하기 시작했던 것이 오늘 글 주제의 시작이었다.
제발 베지터블(vegetable)이 뭔지 알려주시겠어요?
반복 학습되어 이제는 익숙해진 몇 가지의 판매처를 검색해보니,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쇼핑몰이거나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블로그 마켓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헤매도 사이트를 찾을 수 없는 키워드가 있었으니 바로 '베지터블(vegetable)'. 소가죽의 종류를 일컫는 그 베지터블은 아닐 텐데, 미국의 어느 야채가게 이름인가. 구시렁대며 끈질기게 탐색한 끝에 어떤 블로그 마켓에서 베지터블이라는 택이 달린 의류를 반복적으로 판매하는 모습을 보고 이 곳의 정체가 도매 브랜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같은 곳이었어!
사실 도매 브랜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됐던 계기는 더 예전의 일이었다. 자주 가는 쇼핑몰에서 슬랙스를 주문할 때마다 바지에 붙어있는 택이 동일한 것을 보고 '슬랙스 류는 주로 여기서 공급받는구나' 했던 일. 온라인에서 구입한 독특한 디자인의 가디건과 그보다 훨씬 오래전 명동의 매장에서 구입한 특이했던 바지의 택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기 같은 곳이었네?' 하고 혼자 반가웠던 기억. 딱 두 가지 옷만 봐도 이 도매 브랜드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어떨지, 그 도매처의 옷걸이에 어떤 옷들이 걸려있을지가 그림을 그리듯 쭉- 펼쳐져서 참 신기했던 추억이 있다.
어반빈티지 1213 도매 브랜드. 정말 찾고 싶어요!
베지터블, 이 도매처가 사랑받는 이유
다시 베지터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미지의 키워드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니, 여러 개의 판매처에서 이 도매처의 의류를 판매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개하는 옷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취향이었기에 중고마켓에서 한 벌, 블로그 마켓에서 한 벌,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도 한 벌씩 총 세 벌의 옷을 구입해보았다. 기본적으로 베이직한 무드를 가져간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부자재, 디자인, 원단 등 옷의 어떤 한 부분씩에서 유니크함을 가지고 있었다. 왜 이 도매처의 옷들이 많이 팔리는지, 다양한 곳에서 사랑받는지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간절기에 자켓 안에 받쳐 입으려고 구입한 검은색 가디건은 각종 밑단에 물결 모양으로 마감 처리가 되어있었다. (심지어 옷에 붙은 택도 모서리가 물결 모양으로 처리된 것이 소름) 가디건의 유일한 부자재인 단추는 매트한 무광 블랙에 은색 테두리 형태로 모던한 마무리가 되었다. 요즘 같이 일교차 심한 날씨에 가볍게 걸치기 좋은 후드 집업은 원단 자체가 카라 티셔츠에 주로 사용되는 pk 코튼으로, 매우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pk원단이란, 표면이 오돌토돌하고 직조 후 상태가 벌집 모양을 띄는 면 원단의 일종) 디자인은 흔할지 몰라도, 옷을 구성하는 원부자재에 신경을 써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도매 브랜드의 강력한 특징
도매 브랜드는 거래하는 소매처가 여럿이기에 다양한 판매처에서 동일한 상품이 판매된다. 같은 제품이지만 판매처마다 스타일링이 달라 구경하는 재미와 함께 제품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가격은 어느 정도 동일한 선을 가져가는 것 같은데, 왠지 암묵적인 룰이 있지 않을까 싶다. 블로그 마켓의 경우 상품을 판매하는 기간이 짧아 자칫 구매를 놓칠 수 있는데, 스마트스토어 등 다른 곳에서 구매 기회를 찾을 수 있고 적립금을 써서 구입할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도매 브랜드들은 블로그 마켓이나 규모가 많이 크지 않은 쇼핑몰 등과 주로 거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형 의류 쇼핑몰에서는 이 도매처의 상품을 찾아볼 수 없으니, 동대문의 일반적인 도매처들과 뭔가 다른 점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이번에 도매 브랜드를 탐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옷을 선택하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국 같은 브랜드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쇼핑몰에서 'RECOMMENT ITEM'과 같은 타이틀을 붙여, 이 상품을 확인한 사람들이 구경한 다른 상품을 넌지시 추천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내 취향을 찾아 몸소 여행을 떠나보니 그 끝에서 너무나 완벽한 브랜드를 찾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할까! 베지터블 브랜드에 대해 더 알아갈 기회가 생기기를 희망하며, 명확한 아이덴티티와 뛰어난 감각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도매 브랜드들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랑받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