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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Apr 11. 2024

친구네 집 전화번호

소중한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

어릴 적 나는, 친구네 집 전화번호를 외웠다. 다들 같은 동네이니 지역 번호는 필요 없다고 해도, 일곱 자리에 이르는 적지 않은 숫자를 어떻게 외우고 살았을까? 수첩에 적거나, 여러 번 반복해서 암기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그 친구의 얼굴이 익숙해지듯, 친구네 집 전화번호도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 어떤 번호는 아직도 조금만 애쓰면 떠올릴 수 있을 것처럼 어딘가 익숙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하교한 뒤에, 또는 주말에 친구와 만나서 놀기 위해서는 친구네 집 전화번호가 필요했다. "너네 집 전화번호 뭐야?"라는 물음은 그 녀석과 내가 친구가 되기로 했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고, 낯선 어른의 목소리에 "저는 ○○이 친구 누구인데요, ○○이 있나요?"라고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여쭙는 것은 내가 가정교육 제대로 받은, ”같이 어울려 놀아도 되는 아이”임을 알려드리는 일종의 자기 증명 같은 것이기도 했고.




지금의 나에게 있어, 친구네 집 전화번호를 외운다는 말은 어느 하나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나는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숫자의 조합을 암기하지 못한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누구도 집에 전화를 두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로 지내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진짜 친구는 사라졌다. 참으로 편리하면서도 외로운 시대가 되었다.


친구 비스무리한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회사 내에서는 일을 통해 만난 인연으로 가끔씩 밥 약속을 잡는 인맥들이 있고, 동문 모임에 가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기"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여기저기 나를 소개하는 학연들도 있다. 명함을 대신하는 소셜 네트워킹 포털에는 나와 비슷한 분야에서 일하거나 관심 분야가 같은 일촌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 말 그대로 친구 비스무리한 사람들이다.


회사에서는 팀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정작 내 팀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줘야 하고, 괴롭힘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토요일만 되면 부하 직원 두 분을 꼭 집에 데리고 와서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하신 점심을 함께 드셨다.)


최근 이사를 온 동네가 참 조용하고 쾌적해서 마음에 든다. 오가며 마주치는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정작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모른다. 옆집에 아이는 아직 없어 보이고, 반려견은 한 마리 이상인 것 같다. 아마도 맞벌이를 하는 것 같고 주말이 되면 근교로 놀러 나가기를 즐기는 것 같다. 또 다른 한 집에는 자녀들을 다 키워내신 나이 지긋한 어른들만 계시는 것 같다. 오로지 추측에 의존할 뿐이다.    




아직까지 우리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분은,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우리 가족이 살던 주공아파트의 옆집 이웃이다. 어쩌다 학교에 다녀왔을 때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워 우리 집 현관문이 잠겨있기라도 한 날에는 당연하게 옆집 초인종을 눌러 아주머니가 챙겨주는 간식을 먹으면서 TV를 봤다.


일요일에 친구와 만나서 놀기라도 할라 치면, 토요일 오후 헤어지기 전에 내일 만날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해서 약속을 잡아야 했다. 그러다 누구 하나가 안 나오기라도 하면 그 친구네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초인종을 누르거나, 공중전화에 20원을 넣어 친구네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고.


참으로 성가시고 불편하면서도, 정겨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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