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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an 23. 2021

나의 집은 어디인가?

주재원 생활 4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야기

2020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나와 아내는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미국 주재원 생활이 마지막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뉴욕에 꼭 가고야 말겠다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서둘러야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느 해와 다를바 없이 여행을 계획하고, 새해 결심을 적어 내려 가던 그때가 참 좋았다. 결국 우리는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해야만 했고, 3월 중순 이후부터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 머물며 보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1년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던 우리 가족들은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넘기고 우리 가족이 4년을 함께했던 빨간 벽돌의 2층 집을 뒤로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가족들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석 달가량을 혼자 지내다 귀국하는 길. 코로나 확진자 수가 연일 기록을 경신하던 그때,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내 귀국길은 조금 달랐을까? 인천공항에 도착해도 마중 나오는 이 하나 없을 귀국길. 애썼다며 등 두드려 줄 부모님의 어깨를 감싸며 공항을 나서는 장면을 늘 상상했지만, 2020년인 지금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5시간이 넘는 비행, 마스크를 쓴 채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지만 나는 내내 뒤척였다.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몇 번인가 본국으로 출장을 올 기회가 있었다. 출장 전에는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먹고 싶었던 음식도 많이 먹고, 보고 싶은 지인들도 만나겠노라 의욕이 넘치지만, 정작 일정이 시작되면 바쁜 업무와 시차 부적응 등으로 금세 지쳐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렇게 본국 출장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상당히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늘 “떠나는” 곳이던 인천공항이 “돌아가는” 곳으로 바뀌고, 까다롭게만 느껴지던 미국 공항의 입국 심사도 그저 환영 인사 같다. (내 기분이 그렇다는 것뿐, 입국심사대에서 나는 여전히 “너 누구니? 왜 왔니?” 와 같은 이방인 전용 질문에 충실히 답을 해야 했다.) 요컨대, 그때 나는 정말 미국이 내 집처럼 느껴졌다.


미국에서 살던 시절 우리 집 거실의 모습


4년이라는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나도 귀국했다. 나보다 몇 달 먼저 귀국한 가족들은 이미 새로 이사한 집에서 지내고 있었고, 나는 2주 간의 자가 격리를 마치고서야 뒤늦게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큼지막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와이프가 이끄는 대로 어느 아파트의 공동 현관문에 다다랐을 때,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빨간 벽돌의 2층 집이 아닌 아파트 공동 현관을 지나면서 정말 이 아파트 어딘가에 우리 집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한 동안 적응하려면 고생하겠군..."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우려와는 달리 나의 오감은 바로 이곳이 "우리 집"이라고 외쳐댔다. 늘 맡던 집의 냄새, 현관문에 놓인 익숙한 신발들, 못 본 사이 더 큰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 그리고 연신 앞발을 들고 만세를 외쳐대는 하루(우리 집 강아지)까지.


귀국 후 새로 이사 온 우리 집 거실의 모습




그날 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나는 혼자 거실에서 멀뚱 거리며 앉아 있었다. 왠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하는, 집에 돌아온 이 기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먼저 한국으로 귀국한 지 꼭 117일 만에 느끼는 안락함과 편안함이었다. 낮에 처음으로 집에 들어서면서 낯 섬이 한순간에 익숙함으로 바뀌던 묘한 기분을 생각하다가, 문득 117일 전에 혼자 집에 남겨지던 때가 떠올랐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족들을 공항에 실어다 주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던 순간, 가족들의 소중한 추억이 가득했던 빨간 벽돌의 2층 집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직 이삿짐을 빼지 않았음에도, 가족들이 모두 떠난 집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런 것인가 싶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우리 집을 “00 아파트 00동 000호”라고 불렀다. 어쩌다 가까운 동네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라도 가면 새 집에 익숙해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중년의 아저씨인 나에게 있어 집은 "아내와 아이들과 강아지가 있는 곳”인 모양이다.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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