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에 따라 돈이 왔다 갔다 한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오전부터 코가 말썽이었다.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콸콸(까지는 아니고) 흐르는 하얀 콧물과 동반하는 재채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업무에 집중도 잘 되지도 않고 콧물이 계속 흐르는 탓에 책상 옆에 풀어놓은 휴지만 쌓여갈 뿐이었다. 스마트폰에 문자 알림이 떴다.
문자 내용은 사실상 명령이었다. 내 자동차 보험이 내일 만기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매해 한 번 통화하는 손해보험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 이전에 ECO 마일리지 특약 때문에 자동차 번호판, 계기판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내용을 문자로 안내해주셨는데, 내가 최근 신경이 날카롭고 바빴던 탓에 '해당 사항 없을 거예요'라는 답장만을 보내 놓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자동차 보험 만기가 도래해서요.'
'아, 네 고객님, 근데.. 제가 휴가라서 이따 2시간 뒤에 사무실에 들어갈 거거든요. 그때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있던 그분 건강이 살짝 염려스러웠다. 간단한 통화를 마치고 정확히 2시간 뒤 연락이 왔다. 20대 마지막 해 첫 차를 산 뒤로 아버지와 같은 자동차 보험사를 이용했고, 대략 이 분과 한 시간이 13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럼에도 일 년에 단 하루만 연락하기 때문에 친근감은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0분 정도 유선으로 전년과 다름없이 자동차 보험 갱신을 완료했고 작은 커피 쿠폰을 선물로 받았다. 서로 용무를 마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상담사 분이 지난번 ECO 마일리지 특약에 대해 한 번 더 언급하셨다.
'고객님, 주행거리가 작년보다 길어졌어도 혹시 내년을 위해서 보내주시는 게 어떨까요?'
난 다 끝난 사항을 왜 또 굳이 언급하나 싶었지만 오늘은 정시 퇴근할 거고 마음에 여유가 좀 있어서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퇴근을 하고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 계기판과 자동차 번호판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해 문자로 보내드렸다. 이후 난 머리를 정리하고 저녁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왔다.
하루 동안 쌓였던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자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상담사 분에게 전화가 다시 왔다.
'고객님, 제가 다시 보니까 ECO 마일리지 특약에 할인 대상이시네요. 18,000원 정도 되는데요. 이게 어디예요. 이 금액은 환불해드려야겠어요.'
'아 그래요? 전 해당사항이 없을 거 같았는데..'
'주행한 거리가 작년보다 더 줄었는데요? 이 금액은 환불 처리해서 계좌로 넣어드릴게요. 근데.. 지금 업무팀이 다 퇴근해서 내일 아침에 해 드려야 할 거 같아요.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내일 아침에 업무팀에 얘기해서 조치해드릴게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18,000원. 크다고 하면 큰돈이고 작다고 하면 작은 돈.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끝까지 본인이 맡은 업무를 충실히 해내고자 하는 상담사 분의 프로의식에 난 부끄러워졌다. 그냥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작은 사항을 꼭 챙겨서 고객에게 돌려주겠다는 책임의식으로 보였다.
난 내 일에 얼마나 책임감 있고 주체적으로 해오고 있는지 반성해보았다. 최초 통화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이었거나 정말 휴가였는데 다시 사무실에 출근했을 수 있다(아니면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난 내 상황, 기분만 우선이었고 그분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나 심히 걱정되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힘든 건 아니다.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상황이 어찌 되었든 기분과 감정 표현은 최소한으로 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게 진리라고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상황이 나빠지면 감정에 동요되어 그릇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불안하고 초조할 때 내리는 결정은 끝이 좋지 못하다. 사실 요즘 내 일상이 그렇다. 우울증이 좀 나아졌나 싶다가도 스트레스에 다시 약해지곤 한다. 환경에 따라 내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의지가 사회적 성공에 영향을 미친다는 '마시멜로' 실험을 알고 있는가? 연구 결과는 당시 교육계와 학부모 사이에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는데 사실 이 연구에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실험에 참가한 표본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미국립보건원이 실시한 데이터 기반 분석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일수록 눈앞의 과자를 우선 먹고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인내심과 자제력은 성장형 마음가짐(Growth mindset) 교육 등으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 탁월함의 그릇 by 조현우 지음
사실 요즘 내 주변 환경은 정리가 되지 않았고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자 발악을 하고 있었다. 8월 15일 광복절, 공휴일을 맞아 가구 배치도 바꾸고 안 쓰는 물건 일부를 싹 내다 버렸다. 그리고 음식을 적게 먹고 명상을 했다. 게으름과 패배의식으로 뒤덮인 진흙 같은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자 꿈틀꿈틀,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감사하기. 오늘 상담사 분이 보여준 친절에 감사해하며 우울증의 늪에서 조금씩 허우적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