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먹고 보자
석사 2년, 항공분야 경력 10년, 이후 예상하지 못했던 나름 긴 휴식 1년, 국세청 1년, 과기정통부 1년 반. 사기업 10년 정규직에 국가 전문임기제 3년 차 경력을 지니게 되었다.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나이가 42살이 넘어가니 자꾸 주눅이 들고 내 미래에 확신이 없어진다. 이런 푸념도 한두 번이지 도통 답이 나질 않는다. 다음 달이면 계약 만료인데 이곳은 사람에 대한 계약이 따로 있고 내가 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기간이 따로 있다. 어제 내 자리는 연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리 좋지 못했다.
사실 매일이 국회와 타 기관 대응에 본연의 업무는 사이드로 하고 있고 계약직이라는 신분상 한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최근 몇 주간 심한 번 아웃(Burn out)을 경험했다. 올해 초 새로 오신 과장님과 관계가 매끄럽지 않아 내가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고, 그래서 다시 방산 분야 사기업에 들어가고자 원서를 냈지만 2차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후 지원한 곳은 상시 지원 분야라 언제 답이 올지 모르고.
내 의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가로막혔고 이러한 개인적 불안감에 여자 친구와 결혼도 흐지부지 되고 있다. 직업에 대한 안정이 그나마 마련되어야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에선 그런 게 어딨냐 하며 처음부터 다 갖춰놓고 시작하는 게 어디 있냐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발 디딜 토대 하나만큼은 단단히 만들고 시작하고 싶었다.
잠도 오지 않고 아침에 멍한 눈으로 뜨기 일쑤였으며 찬물 샤워라도 하면 그나마 나았다. 업무는 항시 대기 상태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어 일에 대한 자신감도 없어졌고 싫은 소리 안 듣는 게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병원에 가볼까 생각은 했지만 따로 시간 낼 휴가도 별로 없고 해서 최소한 에너지만 사용하고 있다.
내일은 오후에 과장님이 따로 보자 신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지 대충 감이 온다. 나의 의지를 묻겠지. 별거 아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면 좋으련만 그럴 분은 아니다. 연장이 되면 일을 좀 더 얹혀주실 생각도 있을 거다. 내 옆자리가 잠시 공석이 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전임 과장님이 잠시 그 공석 업무를 맡아달라 했을 땐 해보지 뭐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새로 오신 과장님은 생각이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내 업무를 대충 하지는 않는데 본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아주 사람 기운을 쏙 빼놓는다(본인은 인지 못하겠지만). 다양한 상사를 만나봐 와서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순간순간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리면 아직도 감정이 우선한다. 다만 그 감정은 표출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떨릴지언정 큰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파서 목욕탕에 갔다. 새벽에 다녀오려 했는데 습관처럼 첫 번째 알람이 울리자마자 꺼버리고 내리 1시간을 더 자버렸다. 예전엔 한 번에 잘도 일어났는데 많이 게을러진 건 아닌지.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때를 벗겼다. 냉탕에서 더운 몸을 식히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했다. 이제는 제법 낮이 짧아졌다. 종일 대지에 내리쬐던 뜨거운 열이 밤공기로 식혀지고 있었다. 이윽고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눈앞에 순대국밥 집이 보였다. 아직 저녁을 하지 못한 터라 뜨거운 순대국밥 한 그릇 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 순대는 돼지 창자라 내장 같은 건 못 먹었는데 어른이 되니 국밥 아니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경남 사천 시골에서 신입 사원 환영회를 하고 다음 날 단체 점심 해장으로 찾아갔던 순대국밥 집이 생각났다. 그때도 순댓국은 잘 먹지 못했는데, 내장을 제외하고 순대만 넣은 순대국밥이 있다고 해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당시 내장을 빼 달라는 표현을 잘 못해서 고민하다 그냥 '순대만 넣어서 주실 수 있나요?'라는 문장을 생각해냈다. 그 이후로 순대만 넣은 순대국밥을 먹는다. 다른 이들은 그게 뭐냐고 놀리지만 내가 좋아하는 순대국밥은 이거였다. 뜨거운 국물은 차차 식혀서 먹고 순대만 넣어줬기 때문에 기본 순댓국밥 보다 순대가 많다. 순대를 하나 씩 밥공기 뚜껑 위에 올려놓고 식히면서 쌈장과 새우젓과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국물에 밥 한 공기 말아먹으면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지만 속이 뜨끈해져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순대국밥이 나왔다.
다진 양념을 많이 넣어서일까. 국물이 많이 매워 땀을 좀 흘렸다. 밥 한 공기를 비우고 땀을 닦고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꼭 이뤄졌으면 하는 정규직에 대한 소원이 남아있었지만 일단 생각나지 않았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숙면을 취하고 싶은 생각만 났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