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6시.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을 마치고 포근한 주말을 기대하며 퇴근을 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을 보는 순간 석연치 않은 메시지가 와있었다.
'ㅇㅇㅇ 검토 보고서가 입수되지 않아 주말에 연락드릴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모 사무관님의 단체 메시지였다. 그분도 고생이 참 많다. 그러나 혹시나 하면 역시나. 토요일 아침이 되고 간단히 산책을 마친 후 새우 제철을 맞아 여자 친구와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때 마침 날아온 메시지.
'ㅇㅇㅇ 검토 보고서가 방금 입수되어서 일요일 오전 10시까지 보내야 합니다. 금일 저녁까지 이상 여부를 알려주세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검토 보고서에 담겨 있었다. 순간 힘이 빠졌다. 주말을 망쳤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 같은 'J'같은 성향은 이렇게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이 썩 반갑지 않다.
어찌하랴. 잠시 여자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메시지를 받은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수정안을 작성했고 카톡으로 연신 수정 버전을 찍어 과장님께 보고했다. 보고는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수정하라는 사항은 추상적이었고 난 스케치한 부분에 어떤 색상이 맞을까? 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확인을 받았다. 예상 못했던 일이라 나조차도 짜증이 났는데 상사는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날까? 하는 생각도 하며 말이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상사의 아쉬운 소리는 다른 귀로 흘려듣고 수정해야 하는 사항만을 정확히 이해하려 노력했다. 마지막 확인을 받고 마치니 오후 8시. 거실에 나가보니 여자 친구는 내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거실 등도 켜지 않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언제 나가서 사 왔는지 모르겠지만 맥주 한 캔이 벌써 비워져 있었다.
너무 미안했다. 여자 친구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쥐고 속마음을 말해줬다.
'미안해. 괜히 놀러 오라 해놓고 나.. 일만 했지..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끝냈어. 뭐,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여자 친구가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맞아. 일단 끝냈잖아. 오빠는 최선을 다 했어. 그리고 오빠는 오빠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이잖아.'
순간 마음이 시큼해져서 여자 친구를 꼭 안아줬다. 어찌하다 보니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고 지금 있는 이곳을 자신이 지지해줘서 내가 힘든 거라고 모든 것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내가 선택한 거라고. 반복해서 답해주곤 했다.
그래, 맞다. 난 내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비록 남들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쩌겠냐. 난 최선을 다했고 그들의 기준이 높은 걸.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나의 가치이다.
교도소에서 황금 같은 운동시간에 책을 보고 있던 박새로이에게 한 녀석이 다가가 시비를 건다.
'야, 그거 읽는다고 인생이 달라지냐? 우리 같은 빨간 줄 그어진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아무것도 못해'
순간 박새로이가 그를 밀치며 한 마디 한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가치를 네가 함부로 매겨? 난 다할 거야. 난 내가 원하는 거 다하면서 살 거야!'
출처: 위키백과
나의 가치는 타인이 결정지어 주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비로소 가치는 드러난다. 누가 뭐라 해도 땅볼이던, 뜬 공이던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1루로 전력 질주하던 양준혁 선수처럼, 꽃미남 같은 얼굴은 아니지만 신나는 곡에 맞춰 땀을 뻘뻘 흘리며 춤추는 싸이처럼.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타인의 평가는 그다음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는지 안 했는지는 본인만이 안다.
테이블에 비워진 맥주 한 캔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우리는 9시가 거의 다 되었음을 확인했다. 내가 종일 혼자 있던 그녀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우리.. 슬리퍼 신고 집 앞에 맥주나 한 잔 간단히 하고 올까?'
그녀가 미소 지으며 벌써부터 나갈 채비를 했다. 우린 각자 간단히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섰다. 밖은 쌀쌀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일요일 오전 출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최선을 다한 하루인데,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