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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Dec 13. 2016

#10 <여유>

내 주문 좀 받아줘요

01 | 내 취향을 제대로 인식시키는 방법

 

남자 셋이 얼굴빛이 벌게져서 비틀비틀 커피숍에 들어왔다. 

30대 중반의 남자 세 명이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보면 해장국을 먹어야 할 분위기였지만, 그들은 커피숍을 찾았다. 비록 시작은 소주와 골뱅이였지만 끝은 서양 탕국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마이크와 뜨거운 열정을 벗 삼아 노래방에서 마무리했던 예전 술자리와 다르게, 고요히 집에 들어가고 싶다. 


진짜 남자라면 뜨거운 아메리카노 원 샷 때려야 한다면서, 에스프레소만 따로 마시고 싶단다. 일단 기다려보라고 한 뒤 주문을 모아서 카운터에 섰다. 


"주문하시겠어요?" 점원이 물었다. 

 

적어온 메모지를 펼치고 더듬더듬 주문을 설명했다.

 

"네, 음.. 요거 망고 둘, 망고 티 하나. 망고 티는 너무 뜨겁지 않게 해 주시고요. 그리고 머그컵 말고 테이크아웃 잔에 주세요. 스콘도 추가할게요. 치즈 스콘 하나, 크랜베리 스콘 하나. 총 두 개. 스콘은 이따 나가기 전에 말씀 드릴 테니까 따뜻하게 데워주시고요. 가져갈 거니까 종이백에 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 주문 확인 도와드릴게요. 요거 망고 둘, 망고 티 하나, 망고 티는 너무 뜨겁지 않게. 테이크아웃 잔으로 하시고, 치즈 스콘 하나, 크랜베리 스콘 하나. 둘 다 나중에 데워서 드리는 걸로."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진동벨 울리면 오시면 됩니다"



호기와 다르게 주문은 뭔가 감성 감성 했고, 상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주문을 해 본 게. 개인 취향에 따라 좀 더 난이도 있는 주문을 하는 분들도 간혹 있다. 나는 그런 주문을 못했다. 그저 다 주문할 것처럼 메뉴판을 손으로 훑다 최종 결정은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이었다. 주문이 간단하기에 빨리 나올 수 있었고(성격이 급하다는 건 아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문을 이해시키느라 사소한 실랑이를 하는 게 불편했다. 비록 난 저 메뉴판에 있는 음료를 다 맛보고 싶었어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고 싶었고, 빨리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걸 제대로 주문해보지도 못하면서. 나중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보류했었다. 조금만 돈을 더 내고 한 번만 더 부탁하면 만족, 즐거움 그리고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500원 더 내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수 있는데.


02| 여유가 있어야 내 주문이 정확해진다

 

연말이다. 며칠 뒤면 난 또 한 살을 먹는다. 이뤄놓은 게 없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데. 뭘 그렇게 이루기 위해 소중한 시간도 포기하며 매달렸을까. 영어 성적도 연애 성적도 다이어트도 직장 내 승진도 모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여유 없이 사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까먹었다. 그러니 또 한 해가 지나가는 시점에 난 이렇게 아쉬움만 느낀다. 누가 뒤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지나간 나의 10대, 20대가 다시 찾아와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을 보상해달라고 빚쟁이 마냥 뛰어오는 것도 아닌데, 그저 마음만 급해서 대충대충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챙겼다. 그렇게 관성적으로 살아온 시간이 후회된다. 하지만 후회하면 뭐 하랴. 후회는 감정의 찌꺼기다.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이제 마음속 여유를 좀 챙겨야 한다. 뛰면서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도 있는데 말이다. 집중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설명한 책 <집중의 힘>에서 급한 마음이 들 수록 집중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동을 천천히 하면 실수도 줄어든다고 한다. 나도 프라푸치노 봉봉 라테(이런 제품은 없다) 마셔보고 싶다. 비록 그 음료가 메뉴에 없더라도 일단 물어보고 내 취향을 인식시키고 싶다. 어차피 사람 사이 갈등은 취향의 차이에서 시작되지 않은가.


03 | 긴 호흡으로 살아가기, 버킷리스트

 

이 나이가 되면 지난 경험을 발판 삼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망상이다. 시간은 흐르고 내년도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배움은 끝이 없고 대한민국에 안 바쁜 사람 없다. 내년이 올해보다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년엔 꼭 책 한 권을 내 손으로 직접 가져보고 싶다. 그리도 잘 그리고 싶다. 미국 브루클린과 보스턴에서 한 달을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편해진다. 희망이 내 근육 곳곳에 펌프질을 하는 듯하다. 근육이 커지니 당당해진다.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행복 활동 리스트. 우린 '버킷 리스트'라 한다. 버킷 리스트가 있음으로 내가 내 삶에 요구하는 주문서가 명확해진다. 때론 후회와 절망감에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밤이 있을지라도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는 어제의 하루가 내 삶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버킷리스트가 구체적이어야 주문을 받는 신이 오해하지 않고 정확히 '메뉴'를 내어준다. 그와 친하다면 우선순위를 높여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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