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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Dec 31. 2016

#12 <처음>

끝도 시작도 아닌 다시 처음인 경우

01 | 돌고 돌아도 결국 처음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버지는 손수 커터 칼로 우리 형제의 연필을 깎아 주셨다. 그리곤 조그만 철제 연필통에 가지런히 두 개의 연필과 지우개를 넣어 주셨다. 필통을 가방에 넣고 학교에 뛰어갈 때면 연필통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고, 걸음걸이까지 절로 경쾌해졌다. 뾰족했던 연필심이 둥글 해지고 글씨의 굵기가 두꺼워질 때면 다시 아버지께 연필을 깎아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뭉툭해진 연필을 받아 들고 묵묵히 칼을 연필심 근처부터 비껴내며 깎아내셨다



한 학년이 올라갔을 때, 친구들이 샤파와 휴대용 연필깎이로 학용품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때 손잡이만 돌리면 연필을 상하좌우 균형 있게 깎아주는 샤파가 등장했다.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두어 번의 회전음과 함께 정확하게 심이 깎여졌다. 난 더 이상 아버지께 연필을 깎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교과서가 많아졌다. 아직도 기억난다. 내 책상 자리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1년 교과서들. 하나의 교과서에 최소 하나의 노트가 필요하다. 적어내야 할 분량이 많아졌고 한가하게 연필을 깎을 시간이 없었다. 샤파는 들고 다니기 번거로웠고, 샤프를 사용했다. 머리 부분을 쿡쿡 누르면 심이 나오면서 글씨를 쓸 수 있었다. 얼마나 편리한가. 또한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여유와 편리함을 맞바꿨다.  대학에 입학해서 제출해야 할 리포트가 많아졌다. 삐뚤삐뚤 내 글씨가 아닌 다양한 글씨체가 깔끔하게 찍힌 문서가 좋은 점수를 주었다. 난 무언가를 '쓰기' 보다 '입력'을 했다. 스마트폰이 나오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입력'하고 전송했다. 다이어리를 쓰지도 업무일지를 작성하지 않고 '입력'했다. 연필부터 키보드까지. 손가락 조합으로 정확한 조각을 누르면 글이 되었다. 더 이상 필통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변화를 타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기념품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그때까지 만년필은 비싼 필기구이고 실용성도 떨어지는 물건이라 생각했었다. 마침 선배가 'RHODIA'라는 A4 노트를 줬다. '이거 비싼 거야' 라면서. 무슨 노트 한 권에 만원씩이나.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어보니 뒷면에 만년필 자국이 묻지 않는단다. 종이에도 그런 디테일이. 정말이었다. 기념품을 받은 저렴한 만년필을 종이 위에 스윽 그려보니 뒷면에 자국도 없이 잘 써졌다. 특히 만년필이 종이 위를 거친 듯 스치면서 서걱 거리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다시 아날로그 필기구로 돌아왔다. 문구 덕후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난 어린 시절 내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필통을 가지고 다닌다. 가능하면 적으려 하고 그리려고 한다. 연필, 볼펜, 그리고 만년필을 사용한다. 

내 필기의 역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월의 속도에 내 생각은 정갈한 문서로 정리할 수 있었지만, 글씨는 더욱 못 생겨졌다. 오래간만에 연필을 깎아본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연필을 보며 아버지의 어깨너머 배워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그리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지금에 문득 시작의 소중함을 몰랐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02 |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다시 처음

 

난 매년 겨울이 오면 습관적으로 찾아 듣는 곡이 있다. 고 김현식 님의 <다시 처음이라오>. 이 곡은 그가 죽기 며칠 전 병상에서 힘들은 몸을 일으켜 홀로 기타를 튕기며 녹음한 곡이다. 지금 보다 한참 어렸을 때 그의 노래를 듣자마자 멍해진 기억이 있다. 특히 그 가사에.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다시 처음이라니. 죽음을 앞에 둔 그의 마지막에 "처음"의 각오를 다지는 음성을 들고 있노라면 인생이 그저 잠시 왔다 가는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영원을 꿈꾸지만 막상 끝이 없는 영원을 두려워한다. 시간이 무한하면 좋겠지만 끝이 없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풀장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계속 깊이 들어가는 느낌? 아무튼 그런 느낌이다. 그래도 인간은 영리하다. 두려움을 줄여주는 치트키를 발명했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1년을 기준으로 12달을 나눴고 월을 다시 일로 일을 다시 시분초로 나누었다. 시분초에서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을, 한 달을, 12달을 지나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다. 모든 끝에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매해 마지막 날 해묵은 감정과 일들은 묻어두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축하한다. 

올해의 마지막 날. 소망했던 것들은 유예되었고, 나 스스로 후회되는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과거를 후회해선 어찌하랴. 전인권 님도 이야기하지 않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지나간 것은 묻어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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