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체가 나를 붙들고 있어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야 오늘은 목요일이니까요. 평소보다 퇴근이 세 시간이나 늦었어요. 이대역을 빠져나왔을 때 거리에는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습니다.
「진짜, 못 살겠네.」
앞서 걷던 아저씨가 중얼거리며 침을 모아 바닥에 뱉었어요. 코가 빨갛게 올라온 채 벌렁거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를 가만히 보다가 나도 따라 침을 뱉었습니다. 순간 왜 뱉었지, 싶었지만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돌아올 뿐입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거리 양쪽으로는 밤에 깨어나는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볼이 분홍빛으로 오른 여자는 옆 남자의 팔을 당기고, 뒤에 있던 남자는 미소를 띤 채 자전거에 올라탔어요. 나는 그들을 멍하니 보다 침을 한 번 더 뱉습니다.
내 귀갓길만 모래를 씹는 듯 텁텁한 건가 봅니다. 내 밤만 다 어둡고 낡아빠진 건가봐요. 마주한 염리동의 등은 어찌나 위태롭게 굽어 있는지, 거리가 언제라도 나를 덮치고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다들 아침저녁으로 목구멍에 딱딱한 밥을 넘기면서 말입니다.
알잖아요. 그런 생각이 머리에 사는 게 하루이틀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겁니다. 어라, 움직인다. 끔찍하게 신기하다. 신기해. 이해할 수 없어. 어째서 버티는 거지? 어떻게 숨을 유지하고 있어? 당신들 분명 나 죽어요 울부짖는 사람들이잖아……. 전부 연기였던 건가봐. 괴로움이란 말에 속고 있는 것 아냐? 그런 발음을 계속 하니까 괜히 죽을 맛인 것처럼. 모두가 토로하는 고충, 사실은 곤충의 날갯짓만큼이나 약해빠진 건 아닐까? 그야 우리는 주변이 우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파야만 건강해질 수 있으니까. 인간의 모든 축복은 그야말로 남에게서 오는 거니까…
아, 지겨워.
결여되어 있어요. 분명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무언가가, 아마도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 인간성이라 말해 봤자 인간의 본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그 모난 성질은 어쩐지 내게서 항상 떠나가려고만 합니다. 나는 그게 대단히 높은 무언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한 때는 물론 지구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한 무언가라고, 가끔씩은 뜨겁게 끓어오르기까지 해 우리를 목 너머까지 울컥 차오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물결 같은 거라 믿었습니다. 그치만 이제와선 아무리 생각해도 ‘죽고 싶지 않아’보다 ‘죽고 싶어’가 인간적이라 느껴지는 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만 하겠습니다. 난 그저 아프기 싫은 거예요.
사람은 정말 피곤하면 걷는 와중에도 잠을 잡니다. 아시나요? 주황색 가로등이 지직대는데 나는 그 아래서 머리를 흔들며 졸았어요. 꿈까지 꾸었습니다. 뱀의 몸뚱아리를 한 박 부장이 퇴근길을 침략했어요. 그녀는 혀를 낼름거리며 추가 업무를 던졌는데, 집어들고 보니 피로를 그림으로 그려 보란 내용입니다. 나는 고민도 없이 붉게 물든 펜을 움직입니다. 그림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점차 선명한 염리동의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골목을 도니 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어라, 미소가 피로 사이로 뚝뚝 새어나왔어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누군가 기다린다는 게 제게는 퍽 어색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송주가 내 집으로 들어온 일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에요. 나는 금세 현관문 안쪽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신발 벗지 마요, 나가게.」
송주는 힘없이 하늘대는 내 팔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힘까지 소진하고 널브러졌는데, 내 마음 같은 건 한 개도 모르고. 어쩐지 신이 난 듯 흥분한 모습이었어요. 눈이 질끈 감겼습니다. 아무래도 말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송주를 집에 들인 건 감당 못할 커다란 실수입니다. 돌이켜 보면 내 달콤한 집을 요상하게 물들이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에요. 그 날 단호하게 거절을 외쳤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꼭 실수를 하는 편입니다. 송주가 막무가내로 회사 앞으로 찾아온 것은 저번 주의 일입니다.
「나, 언니 집에서 살까봐요.」
송주는 명랑하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 자그마한 얼굴을 봤어요. 송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한 글자씩 누르며 다시 말했습니다.
「들어간다구요. 언니 집으로.」
내 집? 들어와? 그게 무슨 소리지? 송주는 내 표정은 본 체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들을 읊었습니다. 듣자하니 그야말로 어이없는 이유들로요. 이를테면
— 제가 당장 지낼 곳이 없는데, 언니 집에는 마침 방이 남잖아요.
라거나,
— 어차피 그 집은 너무 넓어요. 언니 혼자는 관리하는 것만도 힘들 거예요. 맞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얘기를 무슨 아무 일도 아닌 듯,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는 양 툭 떨구는 겁니다. 제가 당신 세계를 침범해도 될까요? 수상할 정도로 당연하게. 세입자 주제에 고개가 빳빳한 것이 영 괘씸했어요. 분명 무언가 비밀스런 의도가 숨어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치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송주의 말도 맞는 듯 싶은 겁니다. 이 공간은 저 혼자에게는 퍽 과분한 듯 싶었어요. 말하자면 자격 미달이란 얘깁니다. 내겐 집의 기능을 온전히 활용할 재간이 없어요. 한 가정의 주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인 부끄럼들이 내겐 셀 수 없이 많으니, 억울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잠을 자야 하잖아요. 다들 그렇지 않아요? 내일로 가야 하잖아요. 나는 내일을 지켜내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대신 나는 주말동안 그야말로 내 모든 시간을 집에 쏟아요. 그야말로 전부. 오래오래 시간을 쓰는 게 곧 거기에 충실한 거니까, 그럼 또 집도 섭섭하진 않을 거잖아요.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주말동안 26시간이니까 어디 보자, 7로 나누면 하루에 3.7시간 정도. 이 정도면 생각보다도 좀더 괜찮아요. 이로써 집의 공허감은 어느 정도 해소되고 균형이 맞게 되는 겁니다. 평일에 빚진 체력을 이틀 간 침대 위에서 갚는 셈이죠.
하지만 송주와는 그런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아마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럴 겁니다. 그저 본인이 집을 책임진다는 둥, 집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둥 다달이 40만원을 납부하겠다는 선언만이 돌아올 뿐이에요. 이게 같은 나라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영 답답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송주의 모습은 선거에 목숨을 걸고 출마한 후보처럼 어딘가 비장하고 당찼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고집스런 공약들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분명 날이 추운 것도 영향을 줬을 겁니다. 나는 추위를 잘 타는 편이니까요. 뜨거운 심장이 하나쯤 방 안에서 뛴다 생각하니 마음 시린 게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또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소에도 꽤나 자주 보는 사이였어요. 아무래도 나보다는 송주가 집의 주인인 쪽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 내 집은 마침내 예쁨받을 수 있고, 또 마침내 건강해질 수 있으니까요. 돌봄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내가 그 건강을 나눠 받을 수도 있겠죠. 그렇게 내 마음은 점차 송주의 계획대로 물들었습니다. 돌아오는 수요일 그녀는 대흥로21길 24번지의 부대표로 임명되었고, 주말이 되자 곧바로 짐을 싸들고 나타났습니다. 그 날부터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송주는 내 일과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무미건조하다고 말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누가 심장을 꽉 쥐는 것처럼 가슴께가 어지러웠는데— 아니, 그런 하루가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요? 다들 뭔가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잖아요. 내 2월은 충분히 바빴습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버거웠다는 말이에요. 직장과 일, 집과 휴식. 대체 이 밖에 어떤 단어가 더 필요한가요? 오히려 무미건조란 딱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 것, 또 아무 습기도 맺히지 않는 것. 이미 내 하루가 넘쳐흐르기 직전이었습니다. 딱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그대로 둑이 무너져 버릴 것처럼. 정신을 차려 보면 며칠이 지나 있고 또다시 간신히 주말, 그리고 또 월요일. 나는 양 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이 가속이 붙은 인생이란 것에 몇 번이나 절망했던가요.
그런 것도 모르고 송주는 매일같이 나를 보채는 겁니다. 체구도 나보다 조그만 게, 어떻게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어제까진 함께 집 청소를 한다거나 음식을 해먹는 정도였습니다. 오늘부터는 대체 무슨 일이 있으려는 걸까요? 퇴근한 사람 팔을 붙잡고 매달리다니요. 그것도 하루종일 그러고 있을 기세로요. 송주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봄맞이를 오늘 꼭 해야 한다니까요. 내일은 다시 추워져요.」
대체 누가 봄을 술집에서, 그것도 밤에 맞이하나요? 물론 나도 압니다. 그 마음만은 일리가 있어요. 나 또한 계절이 변신하는 증거를 여기저기서 목격했습니다. 채도 높은 냄새가 여기저기 꿈틀댄다거나, 손장난을 치는 연인들이 어쩐지 부쩍 말없이 웃는다거나 하는 것. 실은 나야말로 어리숙한 데가 있어 이런 날씨면 꼭 들뜨는 사람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러니 오늘 박 부장이, 그 늙고 나를 유독 미워하는 사람이 A원단사 얘기를 굳이 들춰내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내 퇴근이 세 시간이나 늦어지지만 않았다면 내가 먼저 송주를 보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치만 이제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송주의 손에 가냘프게 이끌려 나갔고, 우리는 언덕 조금 아래의 낡은 호프집에 앉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좋죠. 이제 금요일이에요.」
송주는 명랑하게 말하고는 주섬대며 외투 주머니를 뒤지더니,
「이거 이사 준비하다 찾았잖아요.」
하며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 건넵니다. 왼쪽 위아래 귀퉁이가 갈색으로 낡아빠져 불길한 사진이었어요. 나는 테이블에 볼을 맞댄 채 엎드려 조용히 사진을 들여다봤습니다. 두 명이 잔디에 누워 입을 한껏 벌리고 웃었는데, 구겨지고 흐릿하긴 해도 전반적으로 명랑한 기운이 넘쳐흘렀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맥주를 한 입 크게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실눈을 뜨고 좀더 지켜보자니 개중 왼쪽이 송주라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끝이 올라간 눈매로 슬며시 웃으며 입술을 내미는 게, 틀림없었어요. 동아리를 함께하던 시절에도 이 갈색 눈동자는 악명이 높았습니다. 거기에 푹 빠져 송주에게 밤낮으로 애정을 외친 남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거든요. 정작 본인은 그걸 무척 억울하다 말했지만요.
그치만 그 몸짓들도 십분 이해가 가는 게, 가끔 송주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나 또한 아찔하게 빠져드는 것만 같습니다. 작게 흔들리는 갈색 홍채와 그를 둘러싼 채 파직거리는 가느다란 실들과……. 아무래도 거기에는 지독하게 꿈틀대는 생명이 있어요. 대화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 기운에 다들 잡아먹히는 겁니다.
「얄밉네.」
「네? 갑자기 뭐가요?」
이러면 곧장 동그랗게 벌어지는 송주의 눈꺼풀. 돌려 말할 필요 없이 송주는 예쁩니다. 사회의 관점에서 보아도 예쁘고, 나의—개인적이고 독단적이라 말하지만 사실상 모두와 그렇게 멀지 못한—취향 아래서도 예뻐요.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당장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회에게 간택당한 미모의 누군가를 불행하다 선언하는 나의 모습은 아무리 치밀한 논리를 갖췄다 해도 꽤나 우악스럽고 못나 보일 게 분명해요. 사회의 취향에 들면 우선은 좋아요. 나쁠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건 바로 생기가 살랑살랑 흐르는 몸짓을 보유하는 겁니다. 내 눈 앞의 이 못 말리는 스물여섯 숙녀처럼 둘 다에 해당된다면, 그거야말로 살 맛 날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떨까요. 휴대폰을 들면 화면에 비치는 시꺼먼 얼굴. 어딘가 고약하고 병든 눈깔. 분명 나도 매일 아침마다 다른 촉감과 다른 향기를 맞이했던 시절이 있는데.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송주보다도 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에, 사망 처리로 사건을 종결시키기 일보 직전입니다. 종결. 종결? 이런 식으로?
억울해요. 나는 자꾸만 질투가 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처음처럼 청량한 눈망울을 지켜낼 수 있나요? 어제 갓 태어나기라도 한 듯 반짝이면서요. 송주 옆에 자리한 이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어깨동무를 한 채 송주를 끌어당기고 있는 사람. 사진에도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해맑음이 어쩐지 얄미울 지경입니다. 맥주를 한 입 더 들이켰습니다. 꿀꺽꿀꺽 소리. 어느새 잔이 비었어요. 나는 사진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이게 뭔데.」
송주는 금세 눈이 동그래지고는
「뭐냐뇨,」
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뭐냐뇨.」
하고 똑같은 말을 또 합니다. 나는 확 짜증이 나는 마당에 말을 휙휙 뱉었습니다.
「아, 뭐가. 너 옆에는 누군데.」
「자세히 다시 봐 봐요.」
송주는 기가 찬 듯 웃고는 나를 내려보고 말합니다. 대체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만, 나는 몸을 일으켜 사진을 다시 집어들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왠지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어쩐지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았어요. 누구더라?
「누군지 알겠어요?」
송주는 신이 난 모양새로 나를 흘기며 킬킬 웃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그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몇 초간을 그러고 있었어요. 대체 내가 무슨 장난을 당한 건지 한참을 궁리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금세 발끝에서부터 오싹한 기운이 올라오더니, 하나의 의심이 천천히 고개를 내밉니다. 어어, 그치만 이런 웃음이라니요? 얄미운 목구멍. 이렇게나 입을 양껏 벌리고 고개를 젖힌 모양새라니요.
「나라고?」
송주는 대답 없이 웃습니다. 나는 놀란 기분을 넘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이렇게 여름 잔디처럼 촉촉하게 웃을 거였으면, 이렇게 파릇한 모양새를 빚어낼 수 있을 거였으면 여태 선명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요. 이제와 이 낯선 사람이 나라고 우겨봤자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을 어쩌면 좋나요? 송주는 여전히 장난치듯 말합니다.
「말했잖아요. 봄맞이.」
함께 전시를 보러 갔던 날인가? 아니면 밴드 동아리에서 다 같이 나들이를 갔던 날? 되짚어보다 나는 어쩐지 기가 죽었습니다. 속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두 잔째의 맥주가 고통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언니 해요. 나는 다른 사진 있어요.」
내 눈이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자 송주는 혀를 차며 말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못 알아볼 수가 있어요.」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해.」
「그거 아픈 걸지도 몰라요.」
「뭐?」
「지나간 시간이 미워요?」
「…….」
「나는 무서워요. 누군가 음흉하게 언니 가죽을 뒤집어쓴 것만 같아서.」
나는 화를 내려다가 대신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들여봤습니다. 사진은 아까보다 훨씬 더 흐릿하고 구겨져 있었어요. 날렵하고 반짝이는 목선과 음침하게 보일 듯한 입 안쪽,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콧구멍. 아무리 들여봐도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 것만 같습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개인의 과거가 이렇게까지 현재와 분리되어도 되는 걸까… 고인의 영정 사진처럼 이렇게 수줍게 웃고 있어도. 하지만 가만히 보자니 그 얼굴은 어느새 나에 대한 공포와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눈을 맞추자 금세 오싹한 생각이 흘러나와 내 몸을 둘러쌉니다.
대학생 신연정은 살해되었다. 죽인 것은 물론 나다.
나는 손을 발발 떨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썩어버린 손목을 내밀며 자수하는 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나는 무고한 신연정의 목 언저리를 찢어발기고 그 안쪽을 억척스레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집어삼킨 뒤입니다— 그러면 경찰은 내 양 팔을 뒤로 붙들어 수갑을 채우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들이밀며 묻습니다. 네가 살해한 것이 이 사람이 맞아? 사진 안쪽에는 스물 네 살 신연정. 너무나 완벽히 타인인 사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경찰들이 몰려들어 나를 바닥에 업어친 뒤 누르고, 나는 돌바닥에 굴러 얼굴을 짓눌린 채 조용히 자백합니다. 나는 그녀의 기억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나를 구성하는 것 중 절반은 그 시체에 대한 관찰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사회가 붙들고 있습니다. 폐허 같은 몰골…괴물 같은 형상. 그치만, 다들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들 어른이라고 불리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거잖아요…….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는데, 테이블이 갑작스레 꿀렁대더니 내 얼굴로 일어나 달려들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두 팔을 든 채 지독하게 밀려오는 벽을 받아냈어요. 봄맞이라는 단어가 팔랑대며 귓가에서 흩날렸습니다.
눈을 뜨니 창 밖에 검은 공기가 일렁이고 있습니다.
금요일입니다.
알람은 여섯 시를 가리킵니다.
일어나 회사에 가야 합니다.
*
「팔은 괜찮아요? 왼팔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엉엉 울더니만.」
바삐 양치질을 하는 내게 송주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괜찮네, 뭐.」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서려고 보니 어째 점점 왼쪽 팔꿈치 언저리가 욱신거렸던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어제와 같은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샤워를 하거나 옷을 입을 때, 종각역에서 내려 걸어나올 때에도, 심지어는 통증이 욱신거리며 올라올 때마다… 나는 자꾸만 범죄자가 된 것만 같았고, 음침하게 자수하는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습니다. 길이 떨리고 지하철 창문이 일렁대는 통에 몇 번이나 엎드려 배를 붙잡았는지 몰라요. 그렇게 회사에 도착한 나는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요.
웃음이 났습니다. 이러다 갑자기 쓰러져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것도 모르고 여전히 바쁘게 지하철을 타고 내리겠지. 걸음을 한 보라도 늦췄다간 지각을 해버리니까… 나는 회전문을 힘겹게 돌린 후 계단을 올라 3층의 사무실 문을 열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왔네.」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어쩐 일인지 일찍부터 출근한 박 부장이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어요. 어제 꿈에서 혀를 낼름거렸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것보다야 퍽 평온한 모습이지만요. 그 옆에서는 인턴인 찬우 씨가 밝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나는 잠시 눈썹이 짙고 팔이 굵은 찬우 씨를 가만히 봤습니다. 아침에도 졸린 기색 없이 창문을 닫는 게 기운이 넘치는 모습이었어요. 보고 있자면 행동에 여유가 묻어나는 게, 어쩐지 신입답지 않습니다. 찬우 씨는 아마 인기가 꽤 있을 겁니다. 나는 5년 전의 신입 신연정을 떠올렸습니다. 저런 씩씩함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아니, 아마 그랬을 텐데....... 그런데 찬우 씨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는 바람에 우리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대리님, 우편 오셨더라구요. 책상에 올려뒀습니다.」
「아, 회사로 올 우편이 있었나? 고마워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습니다. 왠지 감시하다 들킨 것 같은 마음. 지는 것 같아. 별 것도 아닌 일로 민망한 걸 보면 나이가 든 게 분명합니다.
협업사에서 정기 간행물을 보냈나 보다— 하며 나는 천천히 창 옆에 붙은 나의 자리로 걸었습니다. 2월답지 않게 책상이 볕에 흠뻑 젖어 있었고, 그 위에 새햐얗고 네모난 봉투가 정갈하게 올려져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봉투가 과하게 하얗고 낯선 느낌. 나는 서늘한 느낌과 함께 또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신연정은 살해되었다…….
날카롭게 각이 진 문장. 나는 팔을 떨며 천천히 봉투를 집어들었어요. 면은 새하얗습니다. 회사의 주소, 그리고 신연정 세 글자만이 바른 손글씨로 적혀 있을 뿐이에요. 발신인 같은 건 흔적도 없었습니다. 봉투를 잡아뜯자 A4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종이가 대여섯 장 정도 고개를 내밉니다. 나는 천천히 그걸 꺼내들어 맨 앞 장을 바라보았습니다. 팔랑대는 종이의 맨 위에서 어딘가 익숙한 글씨가 눈을 찔렀습니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폐 안쪽으로 뜨거운 공기가 들어찹니다.
‘잘 지내세요?
저는 출근길에 차도에 뛰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