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샤로수길로 불리는 서울대입구역과 낙성대역 사이의 길은 서울 전역을 통틀어서도 유동 인구가 꽤나 많은 편입니다. 특히나 오늘처럼 금요일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다들 분주해요.
나는 골목을 조금 돌아 들어가면 나오는 조용한 카페로 병운을 이끌었어요. 그는 크게 불평하지 않고, 우리는 말이 없이 걷습니다. 마음이란 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분 전에는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화가 치밀어올랐는데, 이제는 벽에서 튀어나온 풀더미 냄새와 고양이 울음소리까지 선명했어요. 나는 몰래 병운의 얼굴을 훔쳐봤습니다. 다시 만나다니. 이런 방식으로요.
그치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언젠가는 우리가 분명 마주할 거라는 우악스런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건방지다 생각하셔도 별 수 없어요. 무언가 장치를 만들어둔 것도 아니고, 계책을 세운 것도 아니구요. 그냥 구원을 믿는 신도 같은 겁니다. 세상에 완결이란 게 있다면 그 전에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 거니까요. 그게 이치에 맞으니까……. 나의 기분은 어느새 잠잠하게 가라앉고 나무도 몇 그루 자라고요, 예쁜 파도도 두어 번 칩니다.
표정을 들키면 안 돼요.
두 골목을 지나치고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눈에 띄게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몇 년만에 드디어 봄에게 외면받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짤막한 인사 정도는 받았다는 말이에요. 금요일 점심, 서울. 물론 업무는 여전히 쌓여 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돌렸을 뿐이지만. 아무렴 뭐 어때요? 따뜻한 공기를 콧 속 가득 들이켜 온 몸을 한 바퀴 돌도록 두었습니다. 병운은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걷더니 퀘퀘한 잿빛 건물 벽면을 올려보며 멈춰섰어요. 이리저리 풍파를 맞은 글자들이 형형색색 페인트로 적혀 있습니다.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비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시. 나는 두 번 더 반복해 읽었습니다. 비밀. 비밀. 비밀스럽게 묻습니다.
‘이름도 색깔도 모양도 알았던 것 같은데 잊었으면요?’
연인 이후의 관계는 먹고 난 통조림 같은 겁니다. 거기에 이름까지 붙이자니 사치스러워요. 나와 병운의 관계를 고민하는 일은 번거로울 뿐더러 딱히 필요성도 없습니다. 친구란 말은 아무래도 편리하죠. 이상한 관계에 대충 가져다 붙이면 얼추 끄덕이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나와 이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자니 가혹합니다. 울음이 나올지도 몰라. 나는 잘 모르겠어요. 다시 마주하다니. 칠 년 전처럼.
우리는 고양이가 밥을 먹으며 맞이하는 자그마한 카페 구석자리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산딸기와 복숭아 맛이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병운은 따뜻한 라떼를 앞에 두었어요. 어라, 옛날에는 저런 거 마신 적 없는데. 나는 커피를 후룹 빨아들이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물어보러 온 건데. 물어볼 것만 더 생겼네.」
「골치 아픈데.」
「그치. 나도 그래.」
무엇부터 꺼내야 좋을까요. 병운의 입이 꾹꾹 움직이더니 무언가 터져나오듯 열립니다.
「편지라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거야?」
「편지.」
「그래. 기억이 안 나.」
20분 전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던 하나의 가설이 이제는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 과장 없이 말하겠습니다. 그 편지들은 나의 1년을 잘라낸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1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을 부여하고 싶어요. 어딘가에 그 글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던 시절이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신뢰가 떨어지려나요? 그치만 분명 진실입니다. 나의 스물여섯, 나의 진실. 그대로 가지고 있다간 여기 안쪽을 뜨겁게 녹여버릴 게 분명했던 것. 그래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행방불명. 나는 대체 살아있기나 한 건지……. 어딘지 모를 곳을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잠잠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병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나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너 내가 한국 떠났던 건 알고 있니?」
「응.」
병운은 중얼거립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쪼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송주가.」
「……그래. 그래. 그 때 얘기야.」
「그 때 편지를 썼다고?」
「그래.」
「……어디에서?」
「모든 곳에서.」
병운은 한 쪽 눈썹을 내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내 입에서는 어쩐지 억울한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못 견디게 좋은 곳에서나, 못 견디게 힘든 곳에서. 무언가 떠오르거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곳에서. 강렬한 하루를 보내거나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보낸 곳에서. 나를 찢어 보냈단 말야.」
병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약간 내리고는, 속이 조금 안 좋은 표정으로 나를 봤어요. 나는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받지 못해서 다행이야. 무슨 말은 했었는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아. 중요하지도 않아. 아무튼 내 전부를 찢어 보냈어. 아니, 그건 사실 내가 아니야. 몰라. 아마 잔뜩 화가 나 있었어.」
「…….」
「날카로운 것들은 죽어. 알아?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너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털어놓는 순간부터 진실이 되니까.」
「대체 그게 무슨…….」
「밖으로 꺼내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한참 지난 기억이 또렷하게 방울지며 떠올랐습니다. 나는 6년 전 상상했던 어느 순간처럼 말을 꺼내고 있었어요. 게다가 다정함. 그와의 대화에서 내 단어들은 있어야만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마 스물여섯의 신연정은 오늘에 와서야 진실에 좀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양쪽 팔이 가볍게 떨렸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가장 다정하게 대한 사람이야.」
내 목소리의 촉촉함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듣던 병운은 그 대목에서 눈동자를 위로 올려 나를 봤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어요.
「나랑 동의는 된 거야?」
「……동의하지 않아?」
목소리가 떨었어요. 애원하는 것처럼요……. 애원할 게 어딨다고.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병운은 어느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중얼거렸습니다.
「조금은,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 그러니까 편지를 보냈다는 거구나.」
「응…….」
나는 목이 막혔어요. 병운은 눈동자가 동그란 채 나를 보고 있었는데, 아마 나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내 눈가를 훑으며 다시 입을 열었어요.
「너, 옛날이랑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래?」
「응. 어디가 어떻게 변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행이야?」
「이상해.」
「왜?」
「몰라. 사람은 한때 바라던 게 이뤄지면 속상하기라도 한가봐.」
「……그게 무슨 말이야?」
「별 얘기 아니야.」
나는 잠시 생각해봤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했다는 말이 왠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말처럼 들려 기운이 빠졌어요. 하지만 그것보다야 당장 궁금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아까 말한 거 있잖아. 너 얘기 들은 거냐고.」
병운은 금세 아까처럼 쭈그러들더니,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꽂았습니다. 그러고는 바닥을 기듯 중얼거립니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송주한테 들은 거 없어?」
「하나도 없어.」
「좀, 좀 이상하네. 물어볼 수 있었잖아. 송주는 그래도 가끔 연락했었는데. 몇 년 전까지는.」
「몰라. 안 물어봤어.」
「왜?」
「궁금하면 물어봤겠지.」
「…….」
병운은 한숨을 내쉬더니 잠깐 뜸을 들였습니다. 눈매가 축 처진 게 물에 젖은 강아지 같기도 했어요. 그는 큰 마음을 먹듯이 숨을 다시 들이켜더니, 자그맣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결혼했어.」
안쪽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 창 밖으로 구멍 뚫린 나뭇잎이 팔랑대며 떨어집니다. 분명히 말해둘 게 있다면 나는 다시 이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맹세코요. 그런 건 지금의 내가 먹어삼킬 수도 없는 종류의 마음이에요. 게다가 예상도 했고, 어렴풋이 응원까지도 했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지금 내 심장은 바닥을 잃어버린 것처럼 끝도 없이 가라앉는 것일까요? 나는 이제서야 아까 병운의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습니다. 인간은 정말 한때 꿈꾸던 게 현실이 되면 속상하기라도 한 건지, 목 언저리가 꿀렁거리며 막혔어요. 나는 웃는 쪽을 택했습니다.
「뭐야. 야, 축하해.」
그렇지만 병운은 웃지 않았고, 빠르게 다음 말을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이혼도 했고.」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