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진동하는 거야
-
나, 공항이야. 새로운 곳으로 가.
새로운 땅, 새로운 공기, 새로운 구름, 새로운 사람들. 먹는 곡물도 뛰는 몸놀림도 소리칠 때 튀어나오는 목의 핏줄도 전부 다른 그런 곳.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할 거야. 엄청나겠지? 가슴이 이렇게 쿵쿵댄 적이 또 있나 싶어. 아무래도 처음 떠나올 때 정도밖에 없을걸? 드디어 유럽에 나의 숨을 녹이는 거야. 항상 계획만 꺼내고는 동남아로 바꾸는 바람에 우린 한 번도 함께 가보지 못했잖아. 결국 함께하자던 약속은 못 지키고 혼자 가게 됐네. 이거 내가 이긴 걸로 봐도 되나? 하하.
가만 보면 우린 처음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새로운 것들 말야.‘첫’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은 전부 짜릿하고 강렬하잖아. 그리고 그 다음부터 한없이 무뎌지기만 하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중앙아시아가 그렇게 색다르고 신기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과 건축물, 그들이 먹는 음식들이 모두 점점 비슷한 모양새로 다가와. 그럴 리가 없는데, 같을 리가 없다는 걸 분명 아는데. 그런데도 뾰족하던 것들이 둥글게 깎여버리는 거야. 너무 속상한 거 있지.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시작할 때 느낌을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는 거야? 침식과 풍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어? 마주할 때마다 늘 처음인 것처럼 말야.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에서 바자르를 돌아다니다가 아이다라는 열여섯 소녀를 만났어. 정말 아름답게 웃는 친구. 아, 이 근방 나라들에선 시장을 전부 바자르라고 불러. 페르시아어에서 비롯된 말인데,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쓰는 ‘바자회’도 같은 어원이더라고. 신기하지?
아무튼 아이다가 나를 하루종일 가이드해 줬어. 월동에 필요한 옷과 물건들을 사는 것부터 맛있는 샤슬릭 식당까지.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친절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어. 생각해 보면 대만도 그랬고, 중국도 그랬네. 그게 나를 너무 놀라게 하는 거야. 미지의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처음 떠오르는 건 애정이 아니라 공포니까. 그러니까, 친절은 그 공포를 이겨낼 용기 있는 사람들만 베푸는 거니까.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몰라.
아이다는 카페에서 일하면서 또 대학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어. 자기도 돈을 모아 해외로 나가보고 싶대. 알지 모르겠지만 이 쪽 나라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거든. 참 대단해. 양고기를 우물우물 씹던 아이다는 살짝 미소짓더니 아버지 얘기를 했어. 그리고 한국.
아버지가 한국으로 넘어와 일하셨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정말 운이 좋으셨던 거야. 이 곳에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도 비자를 못 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 다들 그렇게 갈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기뻐하셨겠어. 또 얼마나 비통하셨을까? 뼈대밖에 없는 건물 4층에서 떨어지실 때는. 허리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때는 말야. 하필 안전 장치는 안전하다 느낄 때 고장이 나지. 지금은 이 곳으로 돌아와 병원에 입원해 계시대.
있잖아, 나 왠지 도망치고 싶더라고.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서 말야.
대체……. 대체 삶이란 게 뭐가 열려 있다는 거야?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것들 앞에선 힘도 못 쓰는데. 내 선택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딱 정해져 있는 거야. 나는 과연 뭐 그렇게 대단한 걸 해냈다고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지? 이 알량한 국적, 알량한 핏줄. 그냥 대한민국이란 뺀질대는 사회에 태어난 것뿐이잖아, 정말 그것뿐이잖아……. 부끄러움도 모르고 차에 뛰어든다느니 하는 말을 지껄였네. 속상하다고 떼를 쓰고, 죽음을 멋대로 입에 올리고. 정작 필사적인 사람들은 그걸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데. 벽에 박은 머리에는 더러운 문장 하나만 계속 맴돌아.
자살은 발명품이다. 자살은 그저 사치품이다…….
있잖아, 원시인들이 자살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아, 이런 말 누군가 들으면 날 끔찍하게 미워할 텐데.
아이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았어. 그치만 이 첫 슬픔을 쥐어든 시절에는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을 쳤을까. 세계를 붙잡고 미운 신음을 얼마나 토해냈을까. 견딜 수가 없었을 거야. 더 이어갈 수가 없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게 맞아. 우리의 모든 처음이 무뎌지는 이유. 아니, 무뎌져야만 하는 이유. 날카로운 걸 계속 끌어안고 있다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잖아. 뜨거운 걸 계속 잡고 있게 두면 안 되잖아……. 권태야말로 안전벨트인 거야. 아찔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안전한 곳에 계속 두려고. 그렇게 우리는 진동하는 거야.
나는 아이다가 이상해.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영어 공부를 하고. 그런데도 씁쓸하게 웃으며 아버지 얘기를 꺼내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여전히 바깥 세상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한다고. 심지어는 한국에도 꼭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니까. 나갔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떻게 퉁퉁 부은 발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거야? 나는 겁이 많아 못 해.
아니, 실은 무서워 몇 번이나 몸을 벌벌 떨었겠지? 몇 번이나 방에 웅크려 무릎을 붙잡고 울었을 거야. 그런데도 결국 그 긴 밤에서 나오려는 걸 거야. 주먹을 꼭 쥐고, 배에 힘을 꽉 주고. 나는 얘기를 다 듣고 아이다의 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였어. 바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될 것 같았거든. 나는 어째서 그 순간 아이다에게서 빛나는 무언가를 봤을까. 어째서, 어째서 아이다가 어디 높은 곳에서 내게 내려준 기회라고 생각했을까.
잊지 않으려고. 세상은 분명 내게 지우라고 협박하겠지만, 머리에 그 총을 들이미는 것도 여전히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이다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꼭 여기 새길 거야. 타투라도 해야 할까? 하하, 아냐. 그건 무서워.
결국 그런 거잖아. 선택이란 게 가녀리고 미약해도 어쩌겠어,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럼 그냥 죽음까지 인정해 버리는 거잖아. 그냥, 그냥 소극적 자살이잖아…….
나는 죽기 싫어. 정말이야.
파도가 쳐도 수영을 해야지. 타지에서 헤매는 한국인 여행자를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처음 했던 말을 잊은 지가 꽤 되었나봐.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거였으면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데도, 그런데도…… 세상은 꼭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야만 할 것 같아. 진실, 진실이니까.
다음 대륙에서 또 어떤 이야기들을 편지할 수 있을까 나도 기대가 되고 신나. 여전히 돌아다니고, 세계를 모을 거야. 너에게 꼭 나눠 줄게. 또 알아? 네가 어떤 사고로 방에 갇혀 버릴지. 또 그럴 때 이 편지가 다시 네가 발을 딛는 데 도움이 될지.
18.11.07
이스탄불행 탑승 게이트 앞 세 칸짜리 의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