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나라고 말할 건 아니죠?
A는 누구일까?
어쩌면 나를 해치려는 사람일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 어쩌면 나를 몇 년 전부터 스토킹해온 사람일지도. 아무래도 송주라도 데리고 오는 편이 나았을지 몰라. 그렇지만 편지에는 꼭 정중하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또…….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아무래도 변태적인 성향인 게 분명해. 남의 편지를 가로채고 또 그걸 이용해 나를 기만하고. 역시 도망치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이미 시간은 일곱시 오 분 전이었고, 아무리 대범한 스토커라도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범죄를 계획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문을 확 열고 들어갔습니다.
카페 안쪽은 자리가 절반 정도 비어 있어 한적했습니다. 나는 앉은 사람들을 구석부터 죽 훑었어요. 어느 쪽이 A일까. A라면 대체 무슨 표정을 하고 앉아 있을까. 구석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커플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한가운데서 초록 빛이 도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여자? 하긴, A는 충분히 여자일 법도 합니다. 그치만 남의 호수에 커다랗게 돌을 던져 놓고 태평하게 차를 마시고 있어? 옆 사람이 지옥에 빠져도 용암만 튀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야?
내 옹알거림이 들렸는지 여자는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책에 집중합니다. 음, 남은 사람은 이제 몇 없는데. 설마 LP를 만지며 웃고 있는 사장님? 그 때 뒤에서 누가 어깨를 톡톡 칩니다.
「저기, 좀 지나가도 될까요?」
「아, 예.」
참나, 그렇게 길이 좁은 것도 아닌데. 그 남자는 나를 지나 뚜벅뚜벅 걸어 볕이 드는 창 옆에 앉았습니다.
눈동자를 전부 굴렸지만 A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도망이라도 갔나 싶다가, 아무래도 내가 먼저 온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인자한 미소의 사장님에게 말을 걸러 걸음을 움직였습니다. 걸음을 다섯 개째 내딛는데 어깨를 친 남자가 걷는 나를 다시 부릅니다.
「저기,」
「예?」
그는 머뭇대다가는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장난을 치려던 게 아니라 긴장이 되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접니다. 제가 오늘 선생님을 불렀어요.」
눈썹까지 떨어지는 곱슬대는 앞머리와 뿔테 안경. 투명한 피부와 주름지지 않은 입매. 대학생, 많이 쳐 줘야 사회 초년생 같은 모습이에요. 청자켓을 단정하게 잠궈 입은 남자는 일어서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얼굴, 아니 표정. 남자는 고장난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들이밉니다.
「강다빈입니다.」
믿을 수 없어요.
「편지를 보내셨다구요?」
「예. 제가 직접 보냈습니다.」
「오늘 도착한 편지를요?」
「오늘요? 그게 오늘에야 갔나요? 아슬아슬했네요. 삼 일 전에는 도착할 줄 알았는데요.」
눈 앞의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이죽댔습니다. 생각했던 모습과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어요. 음침한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생글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는 투명한 보조개마저 패여 있습니다. 내가 아무 말 없자 그는 얼굴을 조금 가까이 댑니다.
「다리가 아프시겠어요. 자리에 앉으실래요?」
「…….당황스럽네요.」
「어떤 부분이요?」
「모든 게요.」
나는 외투를 입은 채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함께 앉더니 나를 보고 또다시 생글거립니다.
「백차를 주문해놨습니다. 마음이 잔잔해져요. 좀 드세요.」
잔잔이라니. 이런 음모를 꾸며 놓고 잔잔이라니요. 나는 입을 닫은 채 그 사람을 노려봤습니다. 그는 다시 생긋 웃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어요.
「아, 제가 실례를 했을까요?」
「놀림받는 기분이에요.」
「그럴 의도는 전혀 아닙니다. 죄송해요.」
남자는 곧바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었지만, 눈은 여전히 반짝거렸습니다. 막을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생기,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손동작. 미워할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아무래도 선생님을 뵙게 되어서 조금 신났거든요.」
「제가 왜 그쪽 선생님이죠?」
「보통은 뭔가 가르쳐주신 분을 선생님이라 부르죠.」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대화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 안 해요? 저는 그쪽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저에 대해 궁금하세요?」
「당연하죠. 나를 계속 괴롭히잖아요.」
남자는 갑자기 표정이 굳더니 아랫입술을 핥습니다. 표정을 쉽게 읽히는 사람인 듯 싶었어요. 잠깐 내가 너무 까칠했나 하는 미안함이 일었습니다. 남자는 마음을 먹는 듯 보이더니 다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저는 강다빈입니다. 학생이구요.」
「나이는요?」
「그게 중요한가요?」
「예?」
「나이가 선생님에게 있어 중요한 사항인가요?」
「그야, 기본적으로 나누는 정보잖아요.」
이상한 사람. 눈 앞의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뭐, 비밀은 아닙니다. 스물여섯이에요.」
하고 말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어렸어요. 어쩐지 이 남자에 대해 물어볼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어요. 뭐라도 좋으니 나는 이 사태에 대한 윤곽을 얻고 싶었습니다.
「대체 제 편지가 왜 그 쪽에게 있는 거죠?」
「그야… 제게 보내셨으니까요.」
「제가요? 그 편지는,」
「네. 병운이라는 분. 아마도 전 애인이시겠죠.」
「그러니까요.」
「그치만 받는 이에는 제 주소를 적어넣으신걸요.」
「예?」
머리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휭휭 불었습니다.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니요. 그치만, 그치만 그런 게 가능한가요? 아무리 결별한 애인이라고 해도요. 6년간 만나 온 애인의 주소를 6개월만에 잊고 착각하는 게……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잖아요. 부끄러운 마음에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미안해요. 제가, 제가 그 정도로 멍청이인 줄은 몰랐네요. 주소 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고.」
「아, 그런 말이 아닙니다. 주소는 아마도 정확했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남자는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킵니다. 그러고는 자켓을 벗는데 드러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팔. 손을 식탁 위로 올려두고 백차를 한 잔 들이켠 후 그는 조곤히 속삭였습니다.
「그 때는 제가 거기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쏘아붙입니다.
「어려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건 사실 아무 짝에도 중요하지도 않아요. 것보다야 선생님께 사과드리고 싶은 몇 가지와 감사드릴 것 여러 가지가 있어요. 편지 말이에요.」
「이제야 사과할 게 떠올랐다는 게 신기하네요.」
「그 점도 물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치만 우선은, 제가 실수로 편지를 읽어버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실수요? 실수?」
「예, 그게.」
「어떻게 남의 편지를 실수로 읽을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 낯짝은 저도 좀 배우고 싶네요.」
「진정하세요. 그치만 이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집으로 편지가 오면 누구라도 뜯어보지 않겠어요?」
「……수신인에 다른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어요?」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만……. 네, 네. 맞아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골똘히 보며 말합니다.
「그래 놓고 그걸 실수라고 부른다고요?」
「보통 집으로 온 편지를 수신인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열지는 않죠. 아무튼 저는 모른 채 봉투를 뜯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6년이나 지난 일이에요.」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어쩐지 이 남자와 나의 잘못이 이리저리 뒹굴어 한 몸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읽고 나서는 본인 게 아니란 걸 알았을 거잖아요.」
「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매일같이 그걸 읽게 되어버렸습니다.」
「…….」
「너무 생생했습니다, 글자들이. 위협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말씀대로 나에게 온 것도 아닌데. 나는 그 병운이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불쌍하게 생각되고, 또 다시 부러워졌습니다.」
「저기요, 그런 게 대체 어떻게…….」
「내 모든 하루에 구멍이 크게 났어요. 그 구멍 너머로 다음 편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될 정도로. 아침저녁으로 구멍 너머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요.」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팍 들어 남자를 바라봤습니다. 남자는 이상하게 눈을 잘 맞추지 못하면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결심한 듯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열 여덟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
남자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핥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일렬로 쭉 늘어져 있었죠. 딱 아버지 손목에 그어진 모양처럼요. 사실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거나 가족을 때린다거나 하는 형편없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젠틀한 편이죠. 그러니 그렇게 티도 내지 않고 투정도 안 한 걸 겁니다.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며 속에다가 떠날 이유를 쌓아 둔 겁니다. 그래도 한 번쯤 내색해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미안해요. 심각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치만 그 뒤로 나도 꼭 끝을 마음먹게 되었다던가, 피에 섞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던가……. 정신을 차려 보면 대충 그런 듯이 살고 있는 것도 같았어요. 더 이상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고, 밖으로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구요. 혹은 드러내고 싶은 게 전혀 없을 만한 하루를 찾는다던가요.
가끔 시간이 뭉텅이로 지나 있으면 뭔가 해낸 것처럼 기뻤습니다. 하루들을 완전히 똑같이 빚었어요. 자연사에도 지름길이 있다는 식으로. 편지를 받은 건 대략 그 즈음입니다.」
가슴 언저리가 저렸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것인지, 아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마음대로 털어놓아도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은 어쩐지 이 사람의 말투가 나의 편지와 닮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게 신경쓰여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어요.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이 고백에 억울한 마음이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안쓰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동정. 동정? 내가 뭘 안다고 이 사람을. 아무튼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였습니다.
「……고맙다는 건가요?」
나는 말이 없는 남자의 눈썹을 봤습니다. 남자는 내 눈동자를 봤구요. 얘기가 끝나고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습니다. 오 분쯤이 지났나, 그는 기침을 약하게 두 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갑자기요?」
나는 그를 붙잡아야 할지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얘기할 게 많잖아요.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갑자기 으슬으슬해요. 담배도 피우고 싶고…….」
「장난치지 말고요. 어서 앉아 봐요.」
「장난이 아니에요…….」
눈 앞의 남자는 실제로 얼굴이 벌겋게 올라오기도 했고, 혼자 안절부절 못하며 찻잔을 들었다 놨다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게 연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영악한 사람. 언제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그를 믿고 싶지 않았어요.
「얼른 물어보고 보내줄게요. 그러니까, 편지를 왜 이제서야 내게 보낸 거예요? 그동안 보낼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주소도 모를 뿐더러, 실은 선생님이 누군지도 몰랐으니까요. 말하자면 긴 얘기인데… 아무튼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그리고는 저도 편지를 잊고 있던 중에, 최근에 서랍에서 다시 발견하게 됐어요.」
「그래, 우선 그랬다고 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남은 편지들. 몇 장의 편지가 더 있죠? 그건 다빈 씨가 가지고 있나요?」
「아, 하하.」
「왜 웃어요?」
「선생님이 다빈 씨라고 하는 게 참 신기해서요. 어색하기도 하고.」
「아, 제발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편지가 그쪽에게 더 있냐구요.」
말이 안 통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예.」
남자는 조용히 말합니다.
「제게 더 있어요. 여덟 장. 아니, 여덟 통이요.」
여덟 통!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요. 병운이 제 때 그걸 받았어도 적잖이 질려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첫 번째 편지부터 이미 얼굴이 하얘졌을지도.
「그럼 어서 주세요.」
조급한 목소리에 그 남자는 입꼬리를 움직여 살짝 웃더니, 의자에 걸린 가방을 당겨 꺼냈습니다. 옆으로 멜 수 있는 검은색 가죽 가방이었어요. 그는 그 가방을 양 손으로 열어젖히고 더듬대더니, 똑같이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조금 빠른 동작으로 봉투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하얀 봉투는 뭔가 조금 이상했어요. 이전에 받았던 봉투와 그 두께가 비슷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얇았어요. 찢어들고 시커먼 안쪽을 헤집으니 그 안에는 얇은 종이 몇 장만이 단정하게 접혀 있습니다. 나는 텅 빈 봉투 안쪽을 왼쪽 눈으로 훑으며 말했습니다.
「여덟 통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여덟 통.」
「좀 적어 보이는데요?」
「아, 착각하셨군요. 남은 편지가 총 여덟 개는 맞는데, 그건 그 중 두 개입니다.」
나는 또다시 눈썹이 꺾이며 목소리가 올라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잃어버리기라도 했나요?」
「아뇨, 아뇨. 나머지 편지는 집에 있어요.」
「아니, 불러 놓고 그걸 까먹었어요?」
「까먹은 것도 아니구요. 화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그게,」
머리가 곱슬거리는 남자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더니 곧바로 다시 올려 나를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앞으로 편지를 두 장씩 드릴 생각이에요.」
「뭐라고요?」
「금요일마다도 좋고, 그냥 선생님께서 시간 되실 때도 좋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만나서 편지를 드릴게요.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 신이 날 때나 우울할 때도 상관없습니다. 날씨가 좋거나 나빠도요. 그냥 제게 말해주세요.」
나는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눈매가 약간 휘긴 했지만 장난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를 계속 만나면서 두 장씩 주겠다고요?」
「예. 그 말입니다.」
「편지를 전부 줄 때까지 계속요?」
「총 세 번을 더 만나게 되겠죠.」
「이해가 안 가요. 왜 그런 짓을 해요? 나도 번거롭지만, 다빈 씨는 더 그렇잖아요. 왜 귀찮은 짓을 사서 해요?」
「그건 말입니다.」
「예.」
「아무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만나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누가요? 제가요?」
남자는 입을 우물우물대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느새 앞으로 기울어진 내 등을 다시 등받이에 붙였습니다. 남자는 차를 한 입 더 마시고는 다시 정돈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부 드리는 데 일주일이 걸릴 수도, 한 달이나 일 년이 걸릴 수도 있겠죠.」
「왜요?」
「왜라뇨?」
「왜 그런 식으로라도 나를 만나야만 하는 거예요. 내가 대체 뭔데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만난 게 처음이죠.」
「그럼…….」
「저는 선생님을 한참 전부터 봐 왔어요. 봐 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죠. 한참 전부터 읽어 왔습니다. 나는 선생님을 알아요. 알고 있어요.」
「다빈 씨, 뭔가 크게 착각하는 것 같아 말할게요.」
나의 목소리는 차갑게 떨렸습니다.
「다빈 씨는 나에 대해 몰라요. 정말 아무것도. 그 무엇도요. 고작 편지 몇 장으로 나를 안다고 느낀다면,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에요. 그 편지라면 특히나 더요. 그 쪽이 찾는 사람은 이미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속삭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야 당연하겠죠.」
「제겐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필요. 필요…….
남자의 새하얀 얼굴에 달린 눈꺼풀이 빠른 속도로 위아래로 떨렸습니다. 눈동자가 조금 발개진 것도 같았구요. 찻잔에서는 여전히 탁탁 소리가 났어요.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실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치만 나에게, 나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그게 나라고 말할 건 아니죠?」
내 말투는 꽤나 공격적이었습니다. 말하는 중에 그걸 눈치챘어요. 하지만 눈앞의 사람에게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마냥 관련없진 않을 겁니다.」
「그만 좀 해요. 가져 본 적도 없는 걸 결핍이라고 얘기하나요?」
「결핍이 소유에서 비롯된다고 믿으시나요?」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럼 무엇으로부터 오는데요?」
「……인식. 존재한다는 인식이요.」
그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았습니다.
「만지작거리는 순간부터요. 탄생과 결핍은 한 몸인 거죠.」
「대체 그게 무슨…….」
「모든 일은 결핍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일이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는 말하면서 나의 눈동자를 힐끗힐끗 바라봤습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습니다.
「그만해요. 머리가 아파요.」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그의 표정에 은은하게 도는 생기를 보았습니다. 사악한 생동감. 미안함 같은 건 이미 하나씩 찾아 죽여버린 사람처럼. 아프다며 발발 떨던 모습은 연기가 분명해요. 머리가 지끈거려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가죠. 당신이 대체 어떤 시간을 보냈고 내가 또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소통하는 건 너무 무례해요. 이기적이라는 생각 안 해봤어요?」
나는 약이 올라 말한 뒤 옷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잔에 반쯤 남은 백차가 찰랑거렸어요. 뒤를 도는 순간 다빈 씨의 목소리가 어깨를 잡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기엔 좀 설득력이 없지 않나요?」
바닥이 조그맣게 떨었습니다. 아, 이 남자는 나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내 스물여섯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잃어버린 1년, 스스로 목을 조른 1년을. 그의 목소리는 분명 신이 나 있었습니다. 속 어딘가서 뜨거운 게 바글바글 끓어올라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어요.
「6년 전의 선생님을 만난다면 미워하실 겁니까?」
「직접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요.」
시뻘건 말을 그대로 토해냈는데도 속이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올랐어요. 눈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이 커진 채 굳더니,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습니다.
「갈게요.」
우리의 만남은 나에겐 필요없는 일이라는 게 내 결론입니다. 나는 그대로 카페의 유리문을 통해 걸어나왔습니다. 기계 위쪽을 닦던 사장님이 테이블을 흘깃대며 우리의 관계를 유추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