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어

by 이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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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이 주째


이상하다, 터키도 분명 이슬람 국가인데. 어쩜 이렇게 내 생각과는 딴판이지? 다들 뭔가에 홀려 있는 사람들 같아.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어. 우리나라도 분명 세속주의 국가인데, 세속주의라는 게 얼마나 과감한 선언인지 느낄 기회가 없잖아? 자유 안에서 태어나면 자유가 뭔지 몰라. 심해어들이 바다란 게 뭔지 알겠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넘어와서 그런가, 터키에서 그 힘을 확실히 깨닫는 중이야.


터키는 동쪽으로 갈수록 이슬람의 색깔이 짙어져. 지역별 성향이란 게 여기도 있다니까. 이스탄불에서 만난 한 친구는, 동쪽 사람들은 보수적인 꼰대라고 놀리는 거 있지. 괜히 내가 뜨끔하더라고. 실은 나도 이스탄불의 개방적인 모습에 좀 놀랐거든. 그 친구의 말이 얼추 맞나 싶기도 한 게, 동쪽 지역의 숙소들은 남녀 출입구까지도 구분된 곳들이 많아. 또 무슬림들이 많고 라마단 같은 것들도 엄격하게 지킨대. 올해는 또 5월 중순부터 한 달간 라마단이 있었는데, 그러면 무슬림들은 꼭 해가 질 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는 거야. 가게들도 전부 닫고.


모스크 같은 것들은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 그동안 지내왔던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전부 무슬림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투어하는 가이드 옆에서 엿들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아야 소피아는 원래 동로마 제국이 성당으로 지은 거라고 하더라고. 모스크를 상징하는 첨탑 네 개만 나중에 추가한 거지. 정말 놀랍지 않아? 성당으로 지은 걸 그냥 모스크로 써버린 거야.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인 데다가, 우리가 느끼기엔 땅이 여러 나라의 소유였던 적도 없잖아. 적어도 남한은 그렇잖아?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역사도 있는 거야. 궁금해졌어. 이럴 경우에는 땅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 중 어느 걸 내 뿌리로 삼아야 하는 걸까?


땅을 나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나의 움직임이 중요하겠지. 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고정되어 있고, 나의 시각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말야. 그럼 내 조상님들 중에는 로마제국 사람도 있고, 먼 몽골에서 온 사람도 있고 한 거야. 아무래도 좀더 이기적이어야 할 것 같지 않아? 아니, 더 포용적이려나? 둘은, 둘은 같은 건가?


반대로 민족이 나라고 믿는다면? 그러면 좀더 혈통을 중시한다는 이야기고, 어쩌면 생김새도……. 하지만 땅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태어날 때부터 어느정도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가 지내는 곳이 곧 나라가 되는 거야. 어쩐지 좀 오만한걸. 열심히 저항해야 할 것도 같아. 우리 선조가 중국 땅에서 시작했다면 그 곳은 이제 중국일까 한국일까…….


재미있지? 나라라는 건 땅일까, 민족일까? 나도 알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거. 그러니까 그런 대답 하지 마. 안전하려고 좀 그만하란 말야, 재미없게. 그러니까, 나는, 나는. 나라는 건 땅일까, 민족일까. 내가 밟고 있는 이 흙이 바로, 아니 어쩌면 나의 가족과 혈관을 관통하고 흐르는 이 뜨거운 게…….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어.


원해서 받지도 않은 걸 아래로 또 물려준다는 게……. 입양하는 편이 좀더 낫지 않을까? 아니, 그건 그냥 겁쟁이밖에 안 되나?


됐다. 별 얘길 다 했네.




입국 삼 주째


다시 서쪽 끝 동네인 이즈미르로 넘어왔어. 앞서 말한 지역별 성향에 따르자면 터키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이어야 하잖아? 진보는 모르겠지만 개방적인 건 얼추 맞는 것 같아. 길거리에서도 다들 거침없고 자유로워 보이거든. 카페에서도 연인들이 마주보는 게 아니라 옆자리로 앉는 게 자연스러워. 그러고는 자꾸 키스를 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 유럽이라곤 했지만 나는 내심 터키를 아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나봐.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


또 밤에 거리를 나가 보면 있잖아. 춤추는 클럽도 정말 많고 다들 누군가 짝을 찾아헤매는 눈빛이야— 여기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란 게 있다니깐. 어쩐지 내가 기억하는 한국과 닮아 있지. 어제는 호스텔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 한나와 둘이서 앉아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어. 클럽은 아니고, 그냥 댄스 플로어가 있는 펍에서 말야. 그런데 그러고 조금 앉아있으니 남자 분들이 오더라고. 어디서 왔냐, 왜 왔냐, 이즈미르는 어떤 것 같냐…….


익숙한 질문들을 건네더니 그들은 대뜸 춤추자고 했어. 내가 어쨌게?


당연히 거절했지. 겁도 나고, 나는 춤도 못 추고 말야. 근데 한나는 그중 한 명의 손을 잡고 곧장 댄스 플로어로 걸어갔어. 그리곤 양 팔을 머리 위로 올리더니 이리저리 흔들며 춤추더라고.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한나도 모르는 노래였나봐. 아무튼 몸치라는 생각만은 확실하게 들었어, 하하. 하지만 한나의 드레스가 그 곳에서 제일 빠르고 아름답게 휘날렸어.


나는 술에 취했던 건 분명 아냐. 알잖아, 나 잘 마시진 않아도 조절은 곧잘 하는 거. 아마 맥주 반 병 정도 마셨던가? 정신차려 보니 그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있었어. 뭐랄까, 그냥 부러웠던 것 같아. 깨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술 얘기는 아니고, 한국으로부터. 이해가 가니?


아무튼 심장이 정말 빨리 뛰고 소리도 크게 들렸어. 앉아서 나를 기다리던 키가 작은 터키 남자와 왈츠 비슷한 춤도 췄어. 그, 손끝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춤 알지? 격식 있게. 분명 즐거웠어.


그러고 열두 시가 되어 가게에서 나왔어. 춤추던 남자 두 명이 따라 나와 우리에게 물었어. 즐거웠냐고.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그러고는 술을 한 잔 더 하러 가지 않겠냐구 말야. 나는 피곤하다고 말하며 거절했어.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종종 보이는 일 같지? 내 생각엔 크게 다르지 않아. 그 남자분은 나를 좀더 따라오면서 말하더라고. 가능하면 내일 낮에 만나고 싶다고, 메신저를 알 수 있냐고. 그리고 머뭇거리더니, 서툰 영어로 내가 좋다고 말하며 웃었어. 보조개가 패인 채로 수줍게 말야. 나는 고맙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어. 아마 한나도 춤췄던 남자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던 것 같아.


그리고 오늘. 벌써 밤이야.


카페에 앉아 하루종일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어. 춤추러 갈 사람들도 지금쯤이면 준비를 모두 끝냈겠지. 다들 또 어디선가 술을 들이켜고, 머리 어딘가의 벨트를 풀고. 신이 난 표정으로 귀에다 무언가를 속삭이고. 처음 본 누군가에게 애정을 보여주고, 또 갈구하고.


우리 말야, 아니 나 말야. 사랑 같은 거 너무 무겁게 생각했나? 아무튼 일단 즐거운 건데. 즐기고 보면 되는 거였는데. 철근이라도 몇 개 매달아 문을 걸어잠근 것처럼 행동했어. 사실 어제 남자들을 보면서 오히려 신기한 부러움이 올라왔거든. 일단은 애정을 내어놓는 일이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다들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니까. 나는 그냥 겁에 질려서 살아왔던 건가? 세상은 손을 펴는 만큼 담기는 건데…….


안전주의자.

안락하게도, 또 고리타분하게도 느껴져.

진동, 진동…….

조금은 더 팔을 벌려도 좋지 않을까.


메리 크리스마스. 미리 말할게.


2018.12.15

십 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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