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단 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겨우 그 얘기 하고 왔다고요?」
송주는 빨래를 개다 멈추고 나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한껏 올라간 왼쪽 눈썹과 동그래진 입모양. 나 참, 어쩜 저렇게 남의 이야기에 신나하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게 끝? 다시 만날 약속도 없고?」
「다시 왜 만나? 편지도 걔가 보낸 것도 아니었는데.」
「으이구, 이 미련한 사람.」
「뭐가 미련해. 용건이 없는데 왜 더 만나?」
「가끔 궁금해요. 언니는 깨끗한 사람일까요, 지저분한 사람일까요?」
「……난 깨끗한 사람이 싫어.」
「병운 오빠에 대해 더 궁금하지가 않아요?」
「글쎄다.」
「제 딴에는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어쩐지 언니는 좀 과하다. 과하게 그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참 부자연스럽단 말이죠. 언니가 아직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지 못했다는 증거잖아요.」
나는 어쩐지 송주에게서 병운의 목소리가 들려 열이 올랐습니다.
「뭐가 이상해. 이게 편해. 편하게 사는 거야. 다들 그러잖아. 굳이 귀찮고 싶지 않잖아.」
「통계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거죠…….」
송주는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목소리를 줄였습니다. 나는 가르치듯 반박했지만 속으로 나의 행동을 되짚었어요. 오늘 병운의 표정이 어둡고 시무룩한 게 혹시 그런 이유도 있었을까요? 하지만 나는 금세 고개를 저었습니다. 송주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이어 붙였습니다.
「무서워서 떠밀리듯 만나기도 하는 거죠.」
「뭐가?」
「안 만나면 어떻게 될지 뻔하니까.」
「어떻게 되는데?」
「뭐겠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기억 안 나요?」
나는 입을 다문 채 혀끝을 깨물었습니다. 내가 조언이랍시고 스무 살 송주에게 했던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대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한 때는 그것을 정말 진실이라 믿었습니다. 사건 없이 텅 빈 하루를 두려워했던 적도 분명 있어요. 인간을 육체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생각했던 적도…… 분명 나는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니까.」
「변한 걸 벼슬처럼 쓰는 사람이 있으니까 문제죠. 솔직히 말해봐요.」
「뭘?」
「만나고 싶죠?」
또 시작이에요.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습니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하지 마.」
「그런데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뭐가?」
「편지는 병운 오빠가 돌려보낸 게 아니었다는 거잖아요. 아니지, 편지는 애초에 그 사람에게 간 적이 없다.」
「그렇대.」
「그게 말이 돼요? 편지를 왜 못 받았대요?」
「몰라. 사정이 있겠지.」
나는 얼굴 근육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송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왜 편지를 받지 못했는지 같은 건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에 대해 털어놓다 보면 송주가 저 끝까지 이야기의 실을 술술 당겨낼 것만 같았어요. 나는 투명하고 싶지 않아요. 나의 일부였던 사람이 은밀하게 허우적대도록 두고 싶습니다. 하여간에 오늘의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짧고 간결한 두 마디였습니다.
‘이혼도 했고.’
그 사람은 종양을 도려내듯 한 글자씩을 낑낑대며 내놓았습니다. 그 모습은 팔랑대며 낙하하는 나뭇잎 같아서, 나는 당장 그를 끌어안고 떨림을 나눠받아야만 할 것 같았어요.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대로 떨어지게 두는 것은 방조니까요. 도덕적이지 않잖아요? 그치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보다 한참은 큰 벽을 끼고 서로를 마주하는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년의 시간은 그만큼 두꺼운 겁니다. 인류애나 도덕 같은 건 몇 발자국은 물러나야 할 정도로요. 그렇게 우리의 해후는 이물감을 남긴 채 끝이 났습니다.
「이유를 물어봤을 거 아니에요. 저도 알려줘요.」
「글쎄 모른다니까.」
「또 거짓말을 하시네.」
「나는 몰라. 직접 물어보던지.」
나는 침대에 뉘인 몸을 휙 돌려 송주에게 등을 졌습니다. 마주한 벽이 오늘따라 새하얗게 바라져 있었어요. 그 사람이 잠드는 곳, 시야를 가로막는 거대하고 무거운 덩어리도 이렇게 거친 걸까요? 나는 손을 들어 벽지를 가로로 만지작거렸습니다.
송주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는데, 어째 그런 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다시 송주 쪽으로 돌렸습니다.
「이것 봐, 사실은 털어놓고 싶으시구만.」
「아우, 깜짝이야.」
어느새 살금살금 침대 앞으로 다가온 송주가 엎드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굴의 위쪽 절반만이 침대 위로 둥둥 떠서 움직였어요. 늘 이런 식입니다. 무슨 대화를 하든간에 마무리는 배시시 웃는 표정, 저 장난기가 가득한 눈매. 송주의 체력이란 건 정말 기이합니다. 아니, 정신력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송주는 이상할 정도로 언제나 웃습니다. 힘들어한다거나 축 처지는 모습은 실종된 지 오래예요. 어떻게 이렇게 늘상 신이 난 듯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는 무겁고 눅눅한 일들이 이렇게나 가득한데도요. 또 그게 송주를 한없이 투명하고 높은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눈 딱 감고 저한테 한번 말해 봐요. 혹시 알아요? 얘기하다 보면 뭔가 또 새롭게 느껴질지. 누굴 좋아하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데요.」
아니, 어쩌면 그저 속이는 데 능한 걸지도 몰라요. 늘상 즐겁기만 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있대도 그건 분명히 아픈 사람입니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물어보지 마.」
「언니는 사랑하고 싶지가 않아요?」
나는 송주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왼쪽 눈썹이 꺾여 올라간 게, 정말로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어요. 아마 우리는 서로를 같은 표정으로 대하나 봅니다.
「나는 그런 말 지겨워.」
「…….」
「사랑, 사랑, 사랑. 다들 뭔지도 모르면서, 잡아 뜯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안쪽엔 뭐가 뒤죽박죽 섞이고 일그러져 있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사랑이 사랑이지 뭐. 더 뭐가 필요한가?」
「일단 난 그게 뭔지 몰라.」
송주는 내 말을 듣고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무너지듯 다시 누웠어요. 사랑. 밤마다 천장을 헤매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말. 처음 연애하던 때였나, 밥 먹듯이 사랑을 토해내던 시절도 있었는데.
「……점점 모르겠어.」
송주는 눈을 뜨고 바닥에 대 자로 누웠습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쭉 펼쳐 뻗더니, 어딘가 먼 곳을 보듯 말합니다.
「일단… 일단 보고 싶은 것. 내 하루에 그 사람 빈 자리가 생기는 것. 이런 건 어때요.」
「그거 완전 협력사 직원 이야긴데.」
「아, 그래도 좀더 애틋해야죠. 또 육체적인 접촉도 어느 정도 원해야지 않나?」
「그럼 정신적인 부분만 있으면 탈락이야? 뭐, 플라토닉. 그런 건 안 된다?」
송주는 고개를 슥 돌려 나를 흘기고 다시 중얼거립니다.
「오케이. 그럼, 그 사람을 열렬하게 원하게 되는 것. 그러니까, 상대라는 모양으로 몸에 흉터를 그어버리는 것. 어때요? 그래서 상대의 시간을 강탈하려 드는 것, 그럼에도 결국에는 본인의 시간을 헌납하게 되는 것. 상대를 더 애틋하게 응시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럼에도 노력 같은 건 아무 쓸모도 없다는 듯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발목부터 집어삼켜 버리는 것. 주는 동작과 받는 동작이 구분할 수 없이 뒤엉킨 것. 나와 닮아 있는 모습을 보면 은은하게 웃고 불 같이 화가 나는 것. 상대의 어떤 행동도 나와 연관짓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게 되는 것. 또 서로의 솔직함이 고맙다가도 한없이 미워지는…….」
「그만해라. 머리 아퍼.」
「원래 그런 거잖아요. 언니도 그렇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안 쓴다고. 그런 말.」
「참… 피곤하게. 그럼 연애로 할게요. 됐죠? 저는 그래도 언니가 연애를 하고싶어할 거라 믿어요.」
「연애는, 연애는…….」
「또 왜요.」
「연애를 하고 싶어할수록 사랑과는 멀어지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니. 네 모습을 봐라, 이 사랑 환자야.」
송주는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이 상기되며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아니, 저는 그냥 운이 안 좋아서—」
「그래, 그래. 누가 뭐래?」
「됐어요, 됐어. 병운 오빠를 그렇게 지켜주고 싶나본데, 말하지 않겠다면야 어쩔 수 없죠. 다만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요,」
「…….”
「무언지 다들 정확히 설명 못해도, 생각하면 할 수록 점점 아리송해져도요. 그래도 그게 꼭 필요해져요. 그 이상한 사랑이란 게요.」
「필요…….」
필요, 필요. 낯익은 단어가 입에서 맴돌았습니다. 필요하단 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픈 건가? 살 수가 없는 거야?
「근데 병운 오빠가 아니면 대체 누굴까요? 편지 보낸 사람이요.」
송주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했습니다. 편지를 돌려보낸 사람. 나도 몇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봤어요. 작성한 지 6년 가까이 지난 편지. 돌려보내다. 돌아간다. 편지가 돌아간다. 생각해 보면 돌아간다는 말은 조금 이상합니다. 돌아온다는 말과는 아예 냄새가 달라요. 돌아서, 간다. 그건 아무튼 있어야 할 곳으로 이동하는 느낌이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것들 말입니다. 그러니 편지를 돌려보낸 사람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만 거예요.
‘이 편지는 거기에 있어야만 한다.’
이제 와서. 이런 타이밍에. 어째서?
「그러니까. 병운이가 아니면 대체 누구지.」
「왠지 무섭네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냐. 근데 일단은 생각하지 말자.」
「왜요?」
「다음 주에 마감이야. 주말에도 일해야 할 판이야.」
송주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더니 금세 시들어 빨래를 개러 돌아갔습니다. 한창 바쁠 시기에 휴가까지 사용한 나로서는 더 이상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기울일 겨를이 없어요. 복잡하게 얽힌 과거나 이혼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책상에 앉아 회사에서 받은 하얗고 무거운 노트북을 꺼냈습니다. 노트북을 집에 가져와 여는 것도 이미 익숙하게 된 지 오랩니다. 늘 내 앞에 있는 노트북, 늘 함께하는 직장의 공기. 나는 스티커 메모를 보며 해야 할 일을 확인했어요. 제품분류 및 물량점검, 행사품목 정리. 진통제는 전부 중독성이 있다고 했던가요… 나는 일해야 해요. 속이 거북합니다. 새 메모를 새로 열어 한참 엉킨 머릿속을 풀었습니다.
1. 편지를 가진 사람(통칭 A라고 하자)은 누구인가?
2. 편지들은 대체 어떻게 A의 손에 들어갔나?
3. 나는 몇 장의 편지를 더 썼나? 그러니까, 남은 편지는 몇 장인가?
4. 도착한 4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편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5. 그 중 일부만을 보낸 A의 의도는 무엇인가?
6. 나머지 편지들에서, 그 길고 지독한 세계와 춤을 추면서.
나는 과연 병운에게 무슨 말을 했었나?
*
그 뒤 며칠은 특별한 것 하나 없이 평범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말동안 집에 틀어박혀 매운 떡볶이와 피자를 배달시키며 일했고, 일요일 밤에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한숨을 깊게 쉬었으며, 다시 아침이면 사람들에게 치여가며 출근 지하철에 올랐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평범 같은 건 내가 아니라 남들이 결정하는 사안 같습니다. 수요일 점심 팀원들과 함께 일본식 돈카츠를 먹으며 나는 그걸 알아챘습니다.
「야근을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러다 정말 쓰러지겠어요.」
「일 얘기 하지 말자. 나는 밥 먹을 때만이라도 쉬기로 했어.」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사람들은 들뜨는데, 우리는…….」
김 대리님과 최 사원의 푸념은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어요. 우리의 대화는 점점 누구의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짜증에 매몰되는 삶. 다들 짜증낼 구실만을 찾아헤매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게 나와 꼭 닮아서 또 분한 거구요.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기분이란 건 그렇게 수동적인 것만은 아닐 텐데.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며칠 전에 내가 뭘 본 줄 알아? 신 부장님 있지? 마케팅 팀.」
「네, 그럼요. 뭔데요?」
「그 인간이 글쎄, 탕비실에서 과자를 다섯 개 정도 집더니 자기 주머니에 넣고 퇴근하는 거 있지.」
「네? 아니, 돈도 우리보다 많이 벌면서. 과자 사 먹을 돈 하나 없나?」
「내 말이. 진짜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을까? 하여간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니까. 내가 뭘 믿고 회사를 계속 다니냐. 퇴사를 하든가 해야지. 아우, 내 팔자야.」
「정말 그래요. 우리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는 과자를 좀 더 먹는 게 퇴사까지 할 정도로 미운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김 대리님과 최 사원이 신나 보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를 미워하는 쪽이 편하다는 건 알아요. 그치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다들 사회 밖에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정말 사회 바깥으로 던져지면 금세 비명으로 온몸을 치장할 거면서. 아, 이것 보세요. 나도 같은 사람.
오히려 특별하다 싶은 쪽은 인턴인 찬우 씨였습니다. 무슨 말을 늘어놓아도 묵묵히 젓가락으로 돈카츠를 집어 입에 넣었거든요. 얼굴에는 언제나 옅은 미소가 일정한 세기로 유지되었구요. 아무래도 그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냥 인턴이라서, 라는 이유보다는 더 깊숙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늘 산뜻한 기분인 듯 보인달까. 송주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요. 자기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분 같은 건 알아서들 좀 결정하란 말야, 가끔씩 핀잔도 주고. 나는 어쩐지 찬우 씨를 볼 때마다 부끄러워 말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건 이렇게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요? 나는 회사에서 없어져도 딱히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없어져 버리는 게 나아요. 꼭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편이 낫습니다. 그게 아마 정답입니다.
창 밖으로는 어느새 나무에 잎이 붙고,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손에 커피를 들고 오갔습니다.
부끄러운 날들이 지나가고, 우리는 마감을 맞이했습니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직장을 얻은 뒤로 시간은 언제나 문제를 낳는 역할이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시간이 흘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끔은 사건이 해결되지 않아도, 그것이 모종의 판정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평범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송주의 말처럼 무미건조한 날들을 또 아니었습니다. 밤을 샌 작업 내용으로 박 부장에게 핀잔을 들을 때는 매운 음식을 먹는 듯 얼굴이 화끈했고, 졸음으로부터 도망치려 세수를 할 때 분명 내 얼굴에는 물방울들이 달랑거렸거든요. 분명 우린 평범했지만, 별 일이 없다니요? 모두들 죽기살기였습니다. 치열하게 하루를 연소시켰어요. 그러니 이 도시에서 평범과 무미건조는 다른 단어인 게 분명합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두 단어가 완벽히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제 마음의 무게는 많이 내려왔습니다. 회의를 거쳐 몇 가지 수정 사항과 다음 기한이 정해졌고, 나는 또다시 퇴근 시간을 몇 번이나 늦췄지만요. 시작을 맞이한 것이 끝 덕분이라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시간 덕분이라면 나는 이제 시간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두 번 정도 주말이 주말다운 모습으로 지나갔습니다.
「연정 대리님. 자리에 우편 올려드렸습니다.」
막 출근해 자리에 앉으려는 내게 찬우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편! 나는 심장이 밑이 없는 계곡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어요. 또다시 금요일. 또다시 우편. 우편이야 회사로 간혹 오기도 하는 거지만요, 등으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불길한 경고가 몸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것 같았어요.
나는 의도적으로 느릿하게 자리로 걸어가 외투를 벗어 걸었습니다. 또다시 새하얗고 각진 봉투. 저런 봉투는 조의금을 담는 데만 사용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졌을 때에만, 극도로 가슴아픈 이야기를 담는 데에만… 나는 봉투를 집어 들어 햇빛에 대고 들여보았습니다. 또다시 몇 장의 종이가 들어있었어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이게 A가 보낸 우편이 맞다면, 그러니까 여기에 담긴 게 내가 써 보냈던 다음 편지들이 맞다면 나는 어쩐지 A에게 고마운 마음이 올라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오늘 밤 나는 그 편지들을 붙잡고 침대를 뒹굴 거예요. 나는 박 부장을 곁눈질로 확인하며 봉투를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뒷면은 저번과는 달랐습니다. 소름 돋도록 새하얀 종이 위에 낙서 같은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어요. 나는 그걸 다시 집어들어 한 글자씩 훑었습니다.
‘3월 14일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삼청동 카페 ‘이스케이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