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편지

by 이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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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인정할게. 파리는 유럽 안의 유럽이야. 그만큼 특출나게 유럽이란 소리지. 건물들의 색깔, 그리고 내는 분위기. 여기만 온통 아이보리색 건물에 푸른 지붕을 써. 에펠탑 잔디밭 위에 앉아서 와인 마시는 상상을 해본 적 있니? 몽마르뜨 언덕 위는? 말도 마. 끝내준다구. 어제는 퐁네프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 퐁네프의 연인들, 우리 같이 봤잖아.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약간 부럽고 약간 무서워하면서. 또 그저께 저녁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온 알렉산드르 3세 다리도 걸었고, 노틀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노틀담 성당도. 화재 때문에 안타깝게도 들어가지는 못했어. 라라랜드에 나온 재즈 바도 갔는데, 다들 고상하게 춤추는 거 있지. 아, 비포 선셋에 나온 서점도 있다. 전부 얘기하려면 끝이 없겠어. 이렇게나 스토리가 있는 곳들이 많아.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 아름다움은 언제나 의미에서 오지.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물론,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아, 진짜 속상해. 분명 나갈 때 가방 안쪽에 챙겨서 나갔거든. 근데 중간에 마트에 들어가서 결제를 하려고 보니 지갑이 없는 거 있지. 아마도 에펠탑 앞 공원을 걸어다닐 때 같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계속 부딪혔거든. 이렇게 순진한 여행객이니 안 노릴 수가 있나. 내가 소매치기였어도 나 같이 신난 사람을 먼저 노렸을 거야. 에이씨, 이런 짜증나는 도시! 내가 여행하러 와서 왜 수시로 내 물건이 잘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거야? 왜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경계해야 해? 진짜 어이가 없어.

아, 너한테 얘기하니까 또 좀 낫다. 숙소에 돌아와서 만난 예진 씨한테도 곧바로 털어놨는데, 그 여자분은 듣자마자 술 한잔 하러 나가자고 하시더라고. 마레 지구의 한 술집에 앉아 소름돋게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어. 건배를 하고 한 입씩을 마시고는, 그 여자가 그러더라.

오늘 하루, 진짜 길었겠어요. 고생했어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정말로 하루가 너무 길어서 잔뜩 피곤하고 지쳤거든. 그런데 말야, 문득 생각이 든 거지. 하루를 길게 보낼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냐? 어차피 오늘의 끝은 정해져 있는데. 같은 시간도 길게 쓰면 좋은 거잖아. 나는 왜 오늘이 이렇게 길었던 걸까? 많은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데 좀 이상하잖아. 사건이 없는 날이 어딨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책상 앞에 앉는 것도 전부 사건이라면 사건인데. 같은 업무를 해도 첫 출근날이 유독 기나긴 건 왜일까. 설명을 못 하겠어. 그럼 이건 어떨까?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면 하루가 길다. 시간이……. 시간이 늘어진다. 좀 이상한가? 시간이 구부러진다. 얼추 맞는 것도 같아. 새로운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란 게 문제지. 도둑질도 말하자면 내겐 첫 경험인 거잖아? 아무튼 별난 일을 마주하면 시간이 휘는 건가 봐.

그런데 왜?


왜 시간이 구부러질까? 나는 왜 가방을 도난당하는 사건을 겪고 오늘을 한없이 길게만 느꼈을까? 해외여행을 떠난 첫째 날은 어째서? 애인을 처음 만나거나 헤어진 날은 왜 꼭 한없이 긴 하루를 맞이해야 하는 거야? 내가 보는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어.

감정. 강렬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면 시간이 더디게 간다. 이야기가 있으면…….

그러고 보면 그 감정이란 거, 인간이 발명한 건가? 음, 아니지. 본능처럼 주워서 쓰는 도구일지도. 기쁨, 슬픔, 짜증, 억울함, 설렘, 수줍음, 이것저것. 높이 올라가면 그만큼 긴 추락을 해야지. 나는 그게 좋아. 늘 잔잔히 고여있는 것보다는, 한없이 높이 갔다가 또 저 아래까지 추락. 그래도 다시 올라갈 때 그게 너무 좋아서. 오르기 위해서는 꼭 떨어져봐야 해. 바닥이 저 아래에 있을 때만 내가 높다는 걸 알 수 있어. 이거 진짜 오만하게 말했네. 떨어져도 무조건 다시 올라갈 자신이 있다는 거잖아.

또, 마지막으로 재밌는 것. A점에서 B점까지 간다고 치고. 어떻게 갈래?

직선으로 가면 너무 짧아.

구부리면 선이 길어지고.

길고.


마음껏 기쁘고 즐거울 것. 마음껏 슬프고 우울하거나 불안해할 것. 마음껏 짜증을 내고 억울해하고 소리를 지르고 설레고 수줍어할 것. 닥치는 대로 좋아하고 또 끔찍하게 미워할 것. 가능한 한 충동적으로 세상을 대할 것. 죽어야 할 이유가 살아야 할 이유보다 많고 쉽다는 건 누구나 알아.


예진 씨는 ‘그래도 평생 술안주 하나 만드셨네요. 소매치기 당한 얘기를 샀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말하더라.

정말 비싼 술안주를 사버렸네.


2019.5.10

영원한 하루,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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