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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하하. 이 말을 드디어 하게 되네. 여행하며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은 상상했던 순간이야. 조금 있으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해. 정말 길고 길었다, 그치? 여행도 그렇고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이 열여섯 시간짜리 비행도.
모두 좋았어, 모든 게. 구글 하나 안 돼서 새롭게 어플리케이션을 받아야 했던 중국도, 산골에 갇혀 잔뜩 아파 골골댔던 타지키스탄도. 친절과 이슬람이 절묘하게 섞여 나를 반기던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와 터키도, 내 오랜 꿈들 그대로 그 자리에서 버텨 줬던 수많은 유럽의 유적과 이야기들도, 불편함의 미학을 확실하게 가르쳐 준, 말도 안 되게 대단한 고대 인류의 유적이 넘쳐나는 이집트도. 그리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나를 토로할 곳이 되어주는 너와 이 편지들도. 네가 이 편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직도 크게 걱정이 되네. 하지만 무책임하게도 나는 마지막 편지까지 끈질기게 왔고, 또 지금도 끄적이고 있다.
어때, 잘 읽고 있는 거지?
그래도 너도 내 여정을 재밌어했으면 좋겠고, 또 조금이나마 가슴이 두근거렸으면 좋겠어. 그래도, 신나는 거잖아! 이 정도의 모험기를 생생하게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공생하고 있어. 이 모험의 기록, 또 이 이야기의 탄생에……. 아, 탄생이라 말하니 자식 얘기 같아서 좀 머뭇대게 되네.
자식이라. 슬슬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고 하려나. 생각의 방향도 금세 한국 안쪽으로 돌아왔어. 너는, 혹시 너는 새로운 애인이 생겼니? 새롭게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이고 밤에는 추운 몸을 붙여 꼭 껴안기도 하고, 그리고 서로의 세계를 맞잡아 공유하고 있어? 만약 그런 거라면 이 편지들은 그냥 도착하자마자 찢어버려도 돼. 아, 찢는 건 너무하다. 읽지는 않아도 좋으니 그러면 그대로 너의 서랍 안쪽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그러다가 나에게 돌려줘. 편지를 열두 통이나 보낸 나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나를 찾아와 욕을 하든 이런 걸 왜 보내냐 질타를 하든 무언가를 말해줘야 해. 우선은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한다구. 일 년간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상상해 봐야 하지 않겠어?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읽지 않는 것도 너무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설령 네가 결혼까지 해버렸더라도, 와이프 몰래 숨어서 전부 읽어. 아, 이거 역시 몹쓸 짓인가? 몹쓸 인간이라 어쩔 수 없나봐.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일 년만에 마주하는 고국 땅이 너무 낯설고 적응이 안 되면 어떡하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면 또 어떡해? 겁도 나고 설레기도 해. 딱 여행 떠나던 때랑 똑같이. 돌아가면 가장 먼저, 가장 먼저 삼겹살을 먹어야지. 또 떡볶이도 먹고, 양념치킨도 먹고. 아, 적응이 힘들다거나 할 걱정은 없겠다. 이렇게 세 개만 있어도 나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
병운아, 나는 이제부터 너를 잊으려고 해.
우리는 서로의 세상에서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서, 어쩌면 서로의 삶이란 걸 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6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꽤나 긴 거잖아. 너와 함께 해본 것들보다 혼자 해본 게 적은 나는 아무래도 홀로서기가 필요할 것 같다. 그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이 세계여행이었어. 하지만 이 여행에서마저 너를 찾아 편지를 끄적이고야 마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용서해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이제 한국 땅을 밟고 이 편지마저 보내고 나면, 너를 마침내 나라는 지저분한 운명에서 떼어내는 거야.
알고 있어, 제일 가능성이 낮은 방법이란 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하면 코끼리만 떠오르는 건데, 잊는 방법으로 잊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는 건 좀 멍청한 거지. 그래도 말야, 나는 멍청한 사람이 좋아. 힘겨운 길을 굳이 택하고 걸어나가는 사람을 한없이 존경하고 좋아해. 김병운이란 사람을 내 비루한 하루의 탈출구로 삼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도 여전히 네가 사랑스럽기를 바란다.
연애 편지 같은 거, 사실 좀 우습게 생각했었는데. 그치만 이건 연애 편지는 아니잖아? 우리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할 것도 아니고. 그저 나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깎아내는 편지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어. 끝까지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나를 또 용서해 줘. 너를 깨끗이 잊어내고 나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너에게서 좋은 것들만 빼먹고 도망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미워.
이제 비행기는 점점 내려간다. 승무원이 테이블을 걷으라고 말하고 지나갔어. 창 밖으로 인천의 모습. 온통 바다랑 갯벌, 그리고 산이 보이네. 우리나라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내가, 내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아, 이제 착륙한다.
안녕. 이 부분을 맨정신으로 쓸 줄은 몰랐네.
시작하면 언제나 작별로 끝나지.
마지막은 아니야. 우린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서로가 새긴 흉터가 여전히 남아있기만 하면.
글씨가 엉망진창이네.
너는 언제나 내 힘겨운 즐거움이야.
고약한 꿈이기도 하고.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