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사랑에 대하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by 번뇌즉보리

사춘기 속을 사는 인간


영어권 관용구 중에 'mother natur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의 어머니와도 같은 대자연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우리 개개인의 어머니 외에도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은 다 자연이라는 같은 어머니를 둔 자식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독 그 모태인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많이 탈각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으로 과학을 만들었고, 과학을 통해 자연을 다루며, 나아가 발아래 두려고 합니다. 자연계의 법칙으로 인해 삶을 제약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은 훌쩍 커버린린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며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떼쓰기나 어리광으로 표현한 까닭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아직 한참 남았거나,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mother nature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자연이 고향이나 부모라는 관계성으로 연결되는 이상 인간은 자연과의 유대를 끊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을 하고 독립을 한다고 해서 부모와의 연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것처럼요. 물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앞날에는 무수한 혁신이 있을 테니,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그 위대한 첫 번째 존재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오만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을 어머니로, 거기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그 자식들이라고 생각했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자식일까요?


저는 자연이라는 부모의 울타리 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저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일종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연이 빌려준 땅 위에다 집을 짓고 살아가며, 자연이 빚어낸 것들을 입고 먹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은총을 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기술 개발에 몰두하고, 자연을 배려하지 않는 시책들을 강행합니다. 이런 자식은 어떤 방향성으로 훈육해야 할까요? 사람의 자식이라면 <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시켜서 박사님과 상담이라도 해 보겠지만 이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사춘기는 고작해야 한두 번의 컨설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지만, 오늘 리뷰할 애니메이션은 이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을 제시합니다.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입니다.


1984년에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1982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결한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원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까지의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인간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주제 외에도 다양한 의식을 풀어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기술 개발과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과 같은 인간의 오만한 행동들, 그것에서 초래된 비극,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까지 120분이라는 러닝 타임 안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우시카는 개봉한 지 40년이 넘은 애니메이션이 됐지만 인간의 사춘기는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고만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밟고 있는 땅은 흙과 풀보다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이 훨씬 많으며, 먹는 음식도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인간의 손으로 가공을 거친 것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이러한 인간의 기약 없는 사춘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전한 메시지와 그 가치는 점점 중대하고 절실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작품 해석을 하기에 앞서 작품 바깥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지금의 지브리를 있게 한 작품


스튜디오 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젊은 시절 토에이에서 일하던 때부터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두 갈래 길을 앞에 두고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토에이에서 일하고 있었으면서도 토에이 작품에 대한 큰 애착을 느끼지 못하던 미야자키는 A프로덕션으로 이직했습니다. 이 무렵 A프로덕션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적인 작품 <루팡 3세>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본래 감독을 맡고 있던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3화까지만 제작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본래 '애니메이션의 시청자들이 나이를 먹어 청년이 되었으니 성인용 TV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취지로 계획된 루팡 3세였으나, 성인용 애니메이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였기에 흥행이 굉장히 저조했습니다. 결국 스폰서는 작품의 방향을 성인용에서 어린이용으로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오오스미 감독은 이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그대로 작품을 팽개친 채 잠적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을 잃은 루팡 3세의 메가폰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연출을 맡는 형태로 넘겨받게 됩니다. 루팡 3세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던 미야자키와는 달리 타카하타는 '범죄를 소재로 하는 성인 만화 원작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루팡 3세 자체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탓에 루팡 3세를 이끌어나간 실질적인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다름없게 됐습니다. 본래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기획한, 니힐리즘을 강조하는 성인 타깃의 피카레스크에서 보다 대상 연령층을 낮춰 학생 시청자에게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로서의 발자취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와 <엄마찾아 삼만리>에 참여하며 애니메이터로서의 경력을 쌓던 미야자키는 두 번의 굵직한 기회를 붙잡게 됩니다.



첫 번째는 1997년 닛폰 애니메이션 주도로 제작되던 <미래소년 코난>의 총감독 자리에 발탁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껏 해 온 것처럼 본인의 역량을 십분 뽐내 해당 작품을 성공적으로 감독해 냈습니다. 그 덕분에 미래소년 코난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후대 애니메이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명작이 되었습니다. 이후 1979년에는 자진해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감독을 맡았습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지금에서야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명작 중 하나지만, 당시에는 극장가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제작비는 3억 엔이었으나 극장 수익은 절반인 1억 5천만 엔이었으니 정말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부진했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우선 당시 일본은 <우주전함 야마토>나 <스타워즈>등으로 인해 SF 작품들이 강세를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SF 요소가 없으며 오히려 성과 공주가 등장하는 고전적인 형태의 작품이었습니다. 즉 시대의 유행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에고가 나쁜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TV에서는 <루팡 3세 2기> TVA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작품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미야자키가 감독했던 1기 루팡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하드보일드한 부분들을 덜어내 훨씬 더 코믹하고 가벼운 형태의 루팡이 방영되는 것을 미야자키는 탐탁잖아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극장판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그려내면서 TV에서 방영되는 루팡 3세 2기에 거역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오타쿠'라는 문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SF나 모에 요소 등 오타쿠들의 기호와 상업 논리로 굴러가기 시작한 일본 서브컬처 시장에 역행하는 작품이었으니 흥행에 실패하는 건 안타깝지만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들은 은하계의 구석에서 작아져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흥행 실패에 대한 소감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의 흥행 실패를 계기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직책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업계에서도 미야자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쏟아지고, 미야자키 본인도 자신의 역량을 의심하며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르게까지 했습니다. 이때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의 편집장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에게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될 만한 만화를 그리라는 권유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삼을 생각으로 만화를 그리고 싶지 않았기에, 애니메이션 제작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과 개인적인 취향을 듬뿍 담아내 만화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만화판 나우시카는 제법 인기가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연재 도중 영상화 수순을 밟게 됩니다. 완결이 채 나지 않은 시점에서 영상화가 진행된 탓에 본즈판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원작과 애니메이션이 다른 결의 작품이 되긴 했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처음에는 1시간 분량의 OVA로 기획됐던 영상화는 미래소년 코난 같은 TVA를 만들고 싶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절충 끝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기회였던 나우시카는 극장에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도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것만으로 흥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신문이나 잡지의 호평과 아니메 그랑프리 등에서 호평을 받더니, 이듬해인 1985년 TV 방영을 바탕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며 비디오 사업으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습니다.


나우시카의 흥행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과 의식적인 부분 둘 다에서 말입니다. 나우시카로 벌어들인 수익과 그 기세를 몰아 새로운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 착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설립된 제작사가 우리가 익히 아는 스튜디오 지브리입니다. 그 이름을 내걸고 발표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은 <천공의 성 라퓨타> 되시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좌), 토미노 요시유키 옹(우)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훗날 회고하길 영화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필름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고 하지만, 원래 작가의 의식과 대중의 인기란 으레 불일치하기 마련입니다. 당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라이벌로 거론되는 또다른 애니메이션 거장 토미노 요시유키 또한 본인이 만든 건담 시리즈가 늘상 마음에 안 든다며 자조했으니 이런 한탄 정도는 이 아저씨들 특유의 앙탈이라고 봐도 좋을 지경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스튜디오 지브리 주관 제작 작품은 아니지만, 지금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어머니와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되돌아오자면 나우시카가 그려낸 세상은 잔혹한 한편으로 아름답습니다. 후술할 '거신병'을 사용한 인간들의 전쟁 끝에 황폐해진 지구, 부해의 침식과 오무로 인해 사람들이 살아갈 곳이 점점 줄어드는 디스토피아적 상황, 그런 세상임에도 어쩐지 아름다워 보이는 오무의 허물, 황량한 사막 일대를 메베를 타고 활공하는 당찬 소녀 나우시카, 한 번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간신히 살아남아 조금은 원시적인 형태로 재건된 문명과 그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등 매력적인 세계관을 묘사해냈습니다. 당시 애니메이션 특유의 부드러운 동화와 미야자키의 생동감 있는 연출, 셀 애니메이션 특유의 색감이 어우러져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지녔습니다.



특히나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밀리터리 매니아, 소위 말하는 '밀덕'이라는 점이 이 작품에서 굉장히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 나우시카가 총기와 글라이더를 사용하는 액션, 페지테의 아스벨이 전투기를 몰며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을 공격하는 장면이나 바람계곡의 노인들이 전차를 탈취하는 공작을 벌이는 장면 등에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액션과 연출을 선보입니다. 이러한 요소들과 거신병 등이 맞물려 SF가 유행하던 시대 속에서 고유한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 흐름에 어느 정도 편승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애니메이션에 가장 잘 적용한 사례이자 이 부분에 있어서의 선구자적 위치라는 것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넘어 일본 창작물 속의 황폐화된 세상, 모래 사막으로 가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지구라는 이미지는 나우시카에서 뻗어나가 발전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우시카의 창작 배경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제 나름의 해석을 주절거리고자 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인간과 자연: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둘의 사랑


부해(좌), 오무(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세상은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채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해오무로 나타납니다. 부해는 세상 곳곳에 자라는 식물과 곰팡이들이며, 이것은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 한국어로 번역할 시 주로 독기라는 표현으로 대체됩니다)를 내뿜어 마스크 없이는 5분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이 부해가 점차 확장되는 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 반경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나우시카가 사는 바람계곡 정도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모두 부해의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착 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부해를 없애려 합니다. 불을 붙여 태워버리거나 잘라내는 등의 수단을 쓰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오무들이 부해의 파괴를 막으려는 것처럼 난동을 부리는 탓에 이마저도 어렵습니다.


오무는 부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초거대 곤충으로, 떼지어 거대하고 단단한 몸집을 내세워서 돌진하면 국가 하나를 쉽게 짓뭉갤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인 생명체입니다. 자연을 황폐화시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건 인간의 욕심과 거신병을 비롯한 문명의 이기로 점철된 인간들끼리의 전쟁이었으니, 어머니 자연은 부해와 오무를 앞세워 못난 자식인 인간에게 일종의 벌을 내리는 것일까요?



하지만 자연은 그만큼 잔인한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나우시카는 아무도 모르게 부해의 식물들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나우시카가 직접 기른 부해들은 독기를 내뿜고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서 부해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깨끗한 물과 흙으로 자란다면 무해한 식물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거기서 자란 부해는 독기를 내뿜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부해는 자연 속 유독 물질들을 빨아들이고 대기로 내보내는 일종의 희석 과정을 거쳐 지구 환경을 정화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부해의 최하층에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무가 부해의 파괴를 막으려 드는 이유는 이런 자연의 의도를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는 생존을 핑계로 부해와 오무를 적대시하고 있었지만 이 둘이야말로 지구의 환경을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존재였고, 오히려 인간이 이 둘을 파괴하려 들며 나아가 지구마저 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과 사랑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식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강건하고 드넓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이며 위대함입니다.


이 과정 속의 아이러니는 인간이야말로 지구의 진정한 병적인 존재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연의 숭고한 사랑이 무색하개도 여전히 부해와 오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바쁜 페지테나 토르메키아의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게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상기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 중요한 사실이란 인간 또한 자연의 자식이며 자연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나우시카처럼 자연 그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하려 하는 것또한 인간입니다.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간은 자연을 관측하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 섭리 속에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동물이었습니다. 나아가 자연에 신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신성시 여기고 섬기기도 했습니다. 고대 신앙의 원조 격인 바알이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인 제우스 등이 비바람과 뇌우를 다스리는 형태로 그려지는 것은 그 신앙이 애초부터 자연과 그 자연 현상을 섬기는 것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지성, 즉 관측하는 힘은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깊게 발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 지닌 자연의 이해는 더욱 깊어져 가서, 이윽고 신앙이나 숭배의 형태를 넘어 과학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며 자연이 점점 황폐해진 것이니 문명의 이기와 과학이야말로 해로운 것이었을까요? 나우시카 속 세상은 과학 기술의 극치였던 거신병이 세상을 멸망시킨 존재로 묘사되고, 과학 기술 없이도 아름답게 살아가는 바람계곡의 주민들을 통해 과도한 문명 발달과 그 이기심에 대한 경계를 묘사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2025년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인류의 과학 기술은 자연을 파괴하는 쪽보다도 지켜나가고 복원하는 쪽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 파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약하게나마 인간이 자신들 나름대로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기억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사랑의 논리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하여 그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며, 자연의 자식인 인간 또한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존재들입니다. 앞서 말한 신앙이나 과학 기술 이야기를 제외하고서라도 바람계곡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최소한의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곳의 공주인 나우시카는 오무와 소통하는 등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공생을 도모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생각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왜 자연이 인간에게 사랑받아야 하는가? 자연은 그런 사랑과 인간 자체가 없어도 문제 없이 흘러갈 것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파괴를 멈추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연을 좀먹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저는 여기서 글의 서두부터 강조한 부모자식의 논리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말을 앞세우고 싶습니다. 대학을 다니며 들은 말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본능의 영역이며 치사랑은 정성의 영역이다'라는 말입니다. 풀이하자면 부모 등의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사랑은 마치 본능처럼 당연한 것이지만, 자식 등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성처럼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그 자식인 인간을 본능처럼 사랑합니다. 때문에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어 주고 그들이 지성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사춘기 자식이 부모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서툴고 제멋대로입니다. 멋대로 신격을 부여하고 멋대로 숭배를 하더니, 지연을 파괴하며 철없이 굴고, 이제서야 다시금 자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툭하면 부모랑 대립하는 사춘기 자식, 그렇지만 부모님의 생일에는 선물과 편지 정도는 꼬박꼬박 챙기던 우리네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연과 인간이 부모자식의 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통념에 자식을 가려서 사랑하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나우시카가 유난히 자연에게 사랑받는 자식이며 그 자체로 특별한 존재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결국 나우시카도, 그녀와 대립하던 토르메키아의 크샤나도, 나아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자연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 전체를 모두 묶어 하나의 자식으로 본다면 군사 국가 토르메키아의 탐욕도, 나우시카가 보이는 사랑과 이해도 모두 인간이라는 자식이 지닌 가능성의 일부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만화 <원피스>에서는 흰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가 '못난 아들을 그래도 사랑하겠다'는 대사를 남겼죠? 조금 우스울지 몰라도 그 말을 끌고 오기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연은 인간의 모든 부분을 긍정하고 품어 주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 된 존재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성을 들여 치사랑을 내보이는 것이 응당의 도리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르는 사춘기 속에서 함양하여야만 하는 최선의 가치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대립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빚어지는 가능성



본작에서 인간과 자연의 생존을 건 치열한 대립만큼이나 강하게 나타나는 또다른 대립은 인간과 인간 간의 대립입니다. 거신병을 동원한 전쟁으로 세계가 거진 궤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고대의 거신병을 싣고 있던 수송기가 바람계곡에 추락한 것을 빌미로 바람계곡의 왕인 지르를 살해하고 토르메키아에 의한 통치를 선언하며 거신병을 복원하고자 하는 크샤나와 그녀의 부관 크로토와는 어찌 보면 인간의 잔혹하고 이기적인 일면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스벨을 통해 좋은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던 페지테의 사람들마저도 오무의 새끼를 인질로 삼아 바람계곡에 주둔하고 있는 토르메키아군을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을 하는 등, 나우시카 속 인간들은 잔악무도한 면이 많이 부각됩니다.


결국 크샤나는 작품 후반부에 인간 최악의 과오인 거신병을 되살려내 오무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으로 '결국 인간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뿐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끔 만듭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잘못을 되풀이하기만 하는, 가능성 없는 존재들일까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작품은 적어도 그 질문에 대해서 부정의 뜻을 내보입니다. 나우시카와 바람계곡의 주민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모든 형태의 폭력과 압제에 굴하지 않으려 하고 저항하며, 공존과 사랑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녀 나우시카와 그녀를 공주로 모시고 따르는 바람계곡의 주민들은 인간이 지닌 상생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나우시카가 홀로 산전수전을 겪으며 오무와 소통하고 그 진군을 멈추는 등의 묘사를 통해 일종의 초인적인 영웅으로 이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나우시카라는 소녀의 어깨 위에 그렇게 무거운 개념들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우시카를 통해 묘사하고자 한 것은 앞으로의 세상을 이끌어 나갈 신세대가 지닌 힘과 가능성일 것입니다. 그런 나우시카를 지지하며 연대하는 바람계곡의 주민들은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 나아가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마음 깊이 믿으며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수많은 잘못을 되풀이할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오의 역사 속에서 분명히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미야자키는 인간의 업보로 인해 황폐화된 세상 속에서도 대립을 멈추지 않는 인간을 통해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한편, 그것으로부터 진보하여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인간상 또한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참 재미있게도 다른 애니메이션과 그 감독 이야기를 잠시 끌고 오려 합니다.



바로 <기동전사 건담>과 그 감독 토미노 요시유키입니다. 미야자키와 토미노의 라이벌리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흥행을 통해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여 상대적으로 스폰서에 덜 구애 받는 독립적 창작 환경 속에서 애니메이션을 그려 온 미야자키 하야오와, 한평생 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틀로 인해 스폰서의 간섭을 듬뿍 받으며 상대적으로 고된 창작 생활을 한 토미노 요시유키는 표면적으로는 라이벌 관계라고들 하지만 서로를 깊게 존중하고 있습니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아, 이건 못 이기겠다'라고 평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미야자키도 토미노의 기동전사 건담을 보고 아주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바로 '기동전사 건담이 없었더라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출처:https://www.oricon.co.jp/news/2216882/full/) 기동전사 건담 역시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며 두 사람 모두 기라성 같은 애니메이션 감독인 만큼 비즈니스를 비롯해 각종 복잡한 측면이 얽혀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두 작품 모두 감명 깊게 본 팬의 입장에서 추측해 보는 두 작품 간의 유사성이라 하면 역시 반복되는 인간의 과오를 꼬집는 한편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세대에 대한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동전사 건담 속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우주에 적응한 신인류, 뉴타입입니다. 뉴타입은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소통하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간파해내며 상대방의 마음과 교감하는 등 일종의 초인적인 에스퍼 능력을 갖췄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은 인류의 반이 죽어나가는 전쟁 속에서 피어난 뉴타입과 이들의 소통을 통해 인류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년인 아무로를 비롯해 모두 20대를 넘지 않는 그 일행들이 모두 뉴타입이라는 묘사가 마지막화에 은은히 드러나는 만큼, 토미노 또한 신세대에 대한 희망을 뉴타입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우시카 또한 오무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끝내 그 초인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구해내는 소녀라는 부분에서 토미노가 그려낸 기동전사 건담과 상통합니다. 저는 단순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건담의 영향을 받아 나우시카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향을 받아 그렸을 확률은 희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1941년생인 두 감독의 작품들이 비슷한 내용의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들이 같은 전후(戰後) 세대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은 명백한 일본의 과오이며 인류 역사상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히 이들은 전쟁의 말미와 패전을 직접 겪으며 자라난 세대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 즉 반전 사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인물들입니다. 자신들이 그 폐해를 경험해 봤기에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고, 그러니 끊임없이 거기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를 자신들의 작품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인간형 기동병기를 타고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도 리얼한 군사적 묘사(전투기나 전차 등)와 거신병 등을 통해 전쟁의 위험성과 그 잔인함을 십분 그려냈습니다.



나우시카는 자신과 완전히 상반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를 살해하고 고향을 점거한 크샤나마저도 처단하지 않고 최소한의 이해와 소통을 하려는 강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부해와 오무의 비밀을 밝혀내고 이들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는 그 미덕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신세대의 공주, 혹은 왕자가 함양해야 하는 것이겠죠. 작품 최후반부에 사람들이 나우시카에게 보내는 경외의 시선은 이러한 미래 세대에 대한 기대감과 경외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부정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쟁은 결국 과거 세대의 업보입니다. 거기에 직간접적으로나마 가담한 사람들이 전쟁과 무관한 미래 세대들에게 신시대에 대한 기대를 맡기는 것이 막연한 일종의 책임 전가는 아닐까요? 왜 새로운 시대의 소녀와 소년들은 과거의 어른들에게서 비롯된 일들의 연장선으로 어깨가 무거워져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든 중재점을 찾고 소통을 하기 위해 총에 맞는 등 사선을 넘나드는 나우시카를 보며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사유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 또한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쪽 두 장의 사진은 토미노 요시유키의 <기동전사 Z건담>에서 나온 장면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노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 당시 토미노가 하고 있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낸 명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저 말을 한 인물은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마저 불사했습니다.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기성세대 또한 그러한 면모를 보입니다. 나우시카의 집사인 미토는 나우시카와 동행하여 갖은 위기를 넘나들며, 마지막에는 건쉽을 몰고 돌격하다가 격추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바람계곡의 주민인 세 할아버지들(사진 우측 하단)도 바람계곡을 지키고 나우시카를 돕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차를 탈취하며 맞서다 포로로 잡히는 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해냅니다.


특히 저는 미토를 비롯한 노인들이 석화증을 앓고 있다는 부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석화증이란 부해의 독이 쌓여서 신체가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나우시카의 아버지인 지르 또한 이 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있었습니다. 과거의 업보인 부해의 독이 몸에 쌓여 끝내 죽게 되는 것은 결국 과거의 논리나 폐해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기성세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세대 갈등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윗 세대도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 경험과 축적된 사상이 있을 테니 젊은 세대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전쟁 없이 살아온 세대도 그런 마당에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더더욱 과거의 일과 옛 사상으로부터 완벽하게 탈각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치 부해의 독이 쌓이는 것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쌓여 있을 지난 날의 과오를 품은 채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토미노와 미야자키의 두 작품은 과오에 얽힌 기성세대가 마냥 포기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기성세대는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지키고 지지해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청년들의 어깨 위 짐을 덜어 주고 등을 밀어 주는 것이야말로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원일 것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과거의 잘못으로 점철되지 않은 새로운 아이들이야말로 다가올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메세지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묻지 않은 미래 세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지의 앞날로 나아가는 것은 역시 험난하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 속에서 젊은이들은 수많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끝내 꺾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동전사 Z건담의 주인공 카미유는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것은 노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지켜준 것이 무색하게도 마음이 무너져내려 모두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나우시카 또한 총에 맞은 채로 끝까지 오무를 저지하던 끝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물론 나우시카는 오무들의 도움으로 메시아처럼 부활하긴 했습니다만, 이처럼 비극적으로 꺾이는 청년의 묘사는 역시 젊은이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 세대의 업보로 인해 젊은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나우시카의 죽음과 부활이 일종의 희생 정당화라는 비판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젊은이들의 희생을 논하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이라면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앞장서서 시대를 개척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몫이지만, 그들이 시대에 스러지지 않도록 같이 걷고 등을 밀어 주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무척이나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이야말로 두 애니메이션 거장이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우시카를 통해 되새기는 사랑의 의미




본작의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의 공주이지만 몹시 당차고 격정적이며 행동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1980년대 기준으로 당시 공주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란 디즈니의 얇고 아리따운 공주 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토르메키아의 병사들을 때려서 죽이는 한편 총과 비행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약자들을 앞장서서 지킬 수 있는 여장부적인 면, 그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 애정을 베풀어줄 수 있는 여자아이의 면모 등 다양한 성격이 공존하는 나우시카의 입체적인 캐릭터성은 이후 많은 여성 캐릭터들의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나우시카라는 캐릭터의 강인함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우시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우시카라는 이름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스케리아 섬의 공주 나우시카에서 유래했습니다. 나우시카 공주는 시녀들과 놀던 중 포세이돈의 파도에 휘말려 섬까지 표류해 오게 된 알몸의 오디세우스와 마주합니다. 다른 시녀들은 경계를 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지만, 나우시카만이 용감하고도 차분한 상태로 오디세우스를 대합니다. 어떻게 이 섬에 오게 되었는지를 묻고, 오디세우스의 사정을 듣고 난 뒤에는 그가 푹 쉬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식사와 쉴 곳을 대접합니다.


그간 너무 많은 수난을 겪은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호의마저 또 신들이 자신을 농락하려는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으나, 나우시카는 오디세우스를 돕는 것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하는 행동이라 말하며 그를 안심시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나우시카의 선한 마음 덕분에 마음을 놓고 재정비를 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에게서 받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긴 모험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인간은 신이 내리는 고난 앞에 평등한 존재이며 자신도 언젠가 그런 고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나우시카는 고전 서사시 속에서 등장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여성의 모습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세상은 이런 사랑과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이 땅을 인간들이 슬픈 현존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메로스가 나우시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어요? (중략) 그런데 우리네 시인들은 왜 이런 사랑을 모를까요?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시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버렸겠지요 - 그럴 것이, 우리에겐 사랑이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다른 류의 사랑은 진정 없는 걸까요? 이같은 순수한 행복의 샘은 아주 말라 버린 걸까요?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中

서사시 속 나우시카가 보여주는 위대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속 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정말 그 말 그대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남녀 간의 성애이며 괴로운 것을 잊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묘약과도 같은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또다른 의미를 찾아서 붙이자면 역시나 결혼의 전주곡 정도겠죠.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좀 더 넓은 범위의 감정,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숭고하게 이뤄지는 일련의 현상들이라는 걸 상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위를 이루고 있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바람계곡의 공주 나우시카는 이 넓은 범위의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무를 단순한 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총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방식으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전용기인 메베를 통해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그것은 연료를 태워 불을 뿜는 엔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힘을 빌려 활공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바람계곡의 주민들은 아기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나우시카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우시카는 밟고 있는 대지와 불어오는 바람을 비롯한 자연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약자와 강자를 불문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헌신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즉 이름의 모티브인 나우시카 공주에게서 강인하고 당차며 자애로운 '진정한 사랑'을 이어받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 의연하게 넘치는 사랑으로 자연과 인간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연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또한 무척 중요합니다. 이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20분을 들여 역설(力說)하고 있습니다. 나우시카의 그 사랑이야말로 전쟁 등 증오의 연쇄에 사로잡히지 않은 신세대가 지녀야 할 가능성이며 덕목입니다. 나우시카로부터 표현되는 강한 생명력과 그 자체의 의미를 다시금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신세계에 걸맞도록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나우시카가 자연과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특별한 존재 내지는 영웅처럼 묘사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때 그녀가 공주라서, 혹은 강하거나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느샌가 방법을 잊어버려 쉽사리 할 수 없는 것, 대상을 가리지 않는 순수하고 솔직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할 줄 아는 소녀였기에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겠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성애적 사랑은 주로 여성성의 가치와 연결됩니다. 나우시카가 성숙의 문턱을 밟고 있는 소녀로 그려진 것은 아마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우시카의 여성성에 대해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성이 갖는, 현대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고전적인 여성의 이미지 -수동적이며 연약하고 남성보다 앞장서지 않는- 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두 팔과 다리로 땅을 달리고 하늘을 누비며 세상과 맞서는 나우시카의 모습은 시대를 앞서나간 여성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맞서 싸우는 강인함이나 세상의 압박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당당함 등 기존의 여성들과는 거리가 있었던 가치들과 <오디세이아> 속 나우시카로부터 계승된 고전적이며 아름다운 여성성, 즉 모성애적 사랑을 겸비한 나우시카는 인류의 과오를 딛고 새 시대를 이끌어나가기에 걸맞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인간의 가능성과 그 아름다움이겠죠.



제가 나름대로 나우시카를 해석하며 다루고 싶었던 부분은 이상입니다. 역시나 1984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수준 높은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를 불문하고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자연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 또한 발견해 낼 수 있도록 돕는 나우시카의 메타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깊은 사유의 계기가 됩니다. 그 사유를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영화 속 주인공 나우시카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우시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는 세 감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수많은 애니메이션 팬과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에게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당연히 애니메이션을 현업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제가 리뷰에서 일일이 다루기에는 그 양이 많으니 저와 인연이 깊은 한 사람만을 다루고자 합니다.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안노 히데아키입니다. 워낙 제 리뷰에서 간접적으로 많이 등장해 이제는 다들 익숙하실 이 아저씨를 중심으로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안노 히데아키(좌), 톱을 노려라!(우)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제자로 거론되는 안노 히데아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에 원화가로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나우시카의 열렬한 팬이며,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속편 제작이나 실사화 제작의 허락을 꾸준히 구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사정과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의사로 인해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안노는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나우시카를 향한 사랑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사진 속 <톱을 노려라!>에서 대놓고 나우시카의 포스터가 등장하는 것은 애교로 보일 지경이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 바로 '이거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애초부터 안노 히데아키가 나우시카에 참여하며 담당했던 부분 중에는 거신병이 있습니다. 요령도 제대로 모르는 신인이었던 안노에게 미야자키는 거신병 장면을 모두 맡겼습니다. 안노가 이 장면을 그려내는 데 꼬박 삼 개월을 들인 덕에 온전히 복원되지 못해 골격이 다 드러나며 거의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거신병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신병의 이미지는 훗날 에반게리온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사진 속 괴기스러운 초호기가 대표적이죠. 외에도 제가 이 리뷰 속에서 다룬 세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토미노 요시유키, 그리고 안노 히데아키에게는 공통적인 작품적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작품을 더 나은 형태로 고쳐 썼다는 것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상술한 대로 연재 도중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습니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결말부가 미야자키의 생각과 맞지 않았으며, 앞서 미야자키가 원본 필름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한다는 것의 원인도 아마 여기서 비롯된 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애당초 미야자키가 그린 마지막 장면의 콘티는 오무와 나우시카가 마주 서는 것으로, 마치 프롤로그처럼 느껴질 만큼 흐릿한 결말이었습니다. 다른 제작진들은 이런 엔딩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기나긴 상의 끝에 나우시카가 희생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특공이라는 비판을 듣는 등 미야자키 본인의 의도와 엇나가버린 나우시카를,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화판에서 자기 스스로 직접 고쳐 쓰게 됩니다.


만화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애니메이션에서 신화 속 영웅처럼 묘사된 나우시카의 캐릭터를 재구성했으며 부해를 비롯한 여러 설정까지 바꿔 가며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메세지를 전하는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애니메이션판 나우시카가 들었던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는 쉽사리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끔 과거의 자신을 딛고 새로운 메세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과거 인류의 과오를 딛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영화 속 나우시카와 닮아 있습니다. 주인공 나우시카가 인간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한편으로 작가인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나우시카를 자기 손으로 새롭게 고쳐 그리며 인간으로서의 진보를 이뤄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라이벌인 토미노 요시유키 역시 주인공이 파멸하는 기존 Z건담의 엔딩이 젊은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Z건담을 새로운 3부작 극장판으로 다시 제작하여 결말을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감독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안노 히데아키 역시 자신의 역작인 에반게리온을 신극장판으로 재창작했습니다. 물론 에반게리온은 무지막지한 성공을 거뒀으니 신극장판 제작이 각종 상업과 비즈니스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을 다 보고 나면 안노 히데아키라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정말 많이 성장하였으며 그 속에서 자신이 느낀 것을 에반게리온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세 감독의 재창작은 어딘가 닮아 있지 않나요? 자기 자신을 딛고 나아가 더 나은 메세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그 의식이 감동적입니다. 시기상으로 가장 앞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다른 두 감독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세 감독에게서 비슷한 작품 풍조가 나타난 것을 통해 창작자를 넘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함양해야 하는 자기 성찰적 태도와 향상심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벅차오를 만큼 좋습니다.




마무리하며: 영원한 사춘기 속을 살더라도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사춘기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 또한 나타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역시나 인간은 말 안 듣는 사춘기 속 자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통해 아주 중요한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끌어안고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그 마음씨를 지닌다면, 세상은 틀림없이 우리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이해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파도치는 바다와 같은 시기라고들 하지만, 아예 멈춰 있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조금씩이나마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진하다 보면 이 사춘기라는 것을 끝맺을 수도 있겠죠. 만일 끝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사춘기라고 해서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식은 없을 것이며, 자식이 사춘기라고 해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우리를 품어 주는 자연을 넘어 또다른 부모나 다름없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 중 하나, 그것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나우시카의 리뷰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지브리 영화를 모조리 다 보고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지식도 역시 깊지 않은 편입니다. 입만 열면 줄줄 쏟아낼 수 있는 제 전문 분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자니 참 막막하게 느껴져서 글을 쓰는 게 유독 오래 걸렸던 것 같습니다. 영화야 6월에 봤지만 생각만 하고 있다가 초안을 잡기 시작한 건 8월 말부터였으니까요. 그래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단숨에 마구 써내려갔던 지난 리뷰와는 다르게 작은 조각글들을 일상의 틈틈이 적고 또 적어 그것들을 모아 얼기설기 기워 만든 것 같은 리뷰가 되었습니다. 어찌됐건 또 큰 벽 하나를 넘은 느낌입니다. 저 역시 조금은 성장한 걸까요?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역시 사랑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위의 리뷰에서야 숭고하고 자애로운 포괄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저 역시 사랑 하면 남녀 사이의 애정을 먼저 떠올리고 맙니다. 유독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 감정이 유독 낯간지러워서 제대로 마주볼 수가 없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도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질끈 감는 식으로 도망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느 정도 살고 보니 사랑이란 감정은 그처럼 일차원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살아가는 것에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희미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뭐라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던 그 감정에 대한 견해를 나우시카를 리뷰하며 맘껏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써서 도무지 목으로 넘길 수 없던 커피도 꿀꺽꿀꺽 잘 마시게 된 것처럼,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갖고 있는 무게와 그 달콤함, 또 씁쓸함까지 제법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본 리뷰의 제목을 이렇게 작성한 것도 작게 보면 어머니 자연과 인간 간의 내리사랑과 치사랑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만, 크게 보면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루고 싶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주관식 문제에 대해 저 나름대로의 답을 써내린 뒤 시험장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라 홀가분하고 즐겁습니다. 저 역시 영원한 사춘기를 살지언정 사춘기 속 가장 큰 난제인 사랑이라는 것을 넘어섰으니 이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자신의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 말대로 자연 속에 있는 가장 위대한 잠언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과 인간의 구도를 넘어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귀속시킨 채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메세지였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기형도의 말처럼 그 잠언을 따라가는 형태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부해처럼 독한 삶의 괴로움과 마주할 때에는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었던 나우시카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문제를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해결했을 때의 기분은 바람을 타고 활공하는 것처럼 상쾌하겠죠. 여러분들께서도 부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감정을 만끽하셨으면 합니다. 저는 나우시카를 리뷰하며 얻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재빨리 다음 리뷰를 쓰려 합니다. 긴 글 읽어 주신 것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몸과 마음으로 듬뿍 느낄 수 있는 계절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v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