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도 좋지 않은 과거,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여 괴롭게 만드는 과거가 있나요? 저는 참 많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크든 작든 그런 과거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중에 따라 각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상이하긴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는 떠올리면 부끄러워서 낯이 홧홧해지고 몸을 가만히 둘 수 없는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근래 들어 '이불킥'이라는 용어로 총칭되는 것 같습니다. 잘 누워 있다가도 이불을 발로 뻥뻥 차게 만들 만큼 부끄러운 과거라니, 참 적절한 신조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중압감이 되어 몸을 짓누르는 과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트라우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입니다. 이런 과거들은 사람의 수에 곱하여 무수히 존재하며 우리 삶에 분명한 영향을 미칩니다. 부끄럽게 만드는 것부터 무언가를 망설이고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것까지, 과거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그 양상을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이 '괴로운 과거'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서브컬처의 영역에서 접근해 볼까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 건담>을 통해 '흑역사'라는 단어를 대중에게 널리 퍼뜨렸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공중파 TV 방송에서도 흔하게 들리는 단어가 됐습니다만, 당시의 흑역사란 토미노 감독이 자신의 기존 작품 세계를 하나의 검고 어두운 역사라고 통합하여 규정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오늘날 간소화된 흑역사의 개념처럼 '어떻게든 감춰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하는 과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시적으로는 토미노 감독의 작품 세계 속의, 거시적으로는 인류의 근현대사 속 전쟁의 역사에 대해 '후손들에게 숨기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역사'라고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 건담>은 과거를 감추고 외면하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흑역사와 직접 마주하는 것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토미노 감독은 <∀ 건담>을 통해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고, 그것을 위해서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리뷰하는 작품도 바로 이 '과거를 직시하는 것'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직전 리뷰인 <사무라이 참프루>에서도 이 이야기를 핵심으로 내세웠습니다만, 그것과는 또 결이 다를 것입니다. 오늘은 <카우보이 비밥>이 보여주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카우보이 비밥이라는 작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은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역작입니다.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전설적인 미디어,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남긴 족적은 애니메이션 방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으며, 불과 몇 년 전에는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열풍의 선두 주자로 낙점되기도 했습니다. <원피스> 같은 본격적인 서브컬처 작품의 실사화 이전에 '세계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2D 애니메이션 실사화'가 태동하는 단계에서 최우선으로 진척할 만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비밥의 영향력과 상징성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비밥의 실사 드라마는 어마어마한 혹평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밥의 명성에 아무런 흠집을 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어쭙잖은 실사화로는 비밥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팬들의 실사화에 대한 만족의 기준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는 점에서 원작 카우보이 비밥이 얼마나 위대한 애니메이션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SF, 특히나 스페이스 오페라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카우보이 비밥만큼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리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시리어스한 스페이스 오페라 애니메이션이 흥행하지도, 활발히 제작되지도 않는 것은 카우보이 비밥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지간해서는 비밥의 아류작이라는 소리조차 못 들을 것이고, 정말 역대급으로 잘 뽑혀야 겨우 비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는 평가를 들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카우보이 비밥의 매력은 대체 뭘까요? 애니메이션이 갖춰야 하는 모든 요소에 있어서 하나하나 짚고 넘어갈 만큼의 장점이 있는 카우보이 비밥이지만, 그 모든 것을 다루기에 앞서 저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듬뿍 반영되었다는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술가들은 으레 본인이 보고 자란 것,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합니다. 당장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자 서브컬처에 있어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취향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인류 문명을 침공하는 거대 괴수인 사도는 그가 좋아하던 <고지라> 시리즈에서, 거기에 맞서는 거대 로봇인 에반게리온은 로봇 애니메이션의 광팬인 안노가 <건담>을 비롯한 작품들에서 따온 것입니다. 더하여 에반게리온이 늘상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있는 것과 싸우는 데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은 <울트라맨> 시리즈의 영향이며, <가면라이더> 좋아하는 안노는 에반게리온이 라이더 킥을 하는 장면까지 넣었습니다. 저는 이 매력적인 방식의 레퍼런스 사용이 에반게리온 대성공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레퍼런스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갖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또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장르를 바꿔 음악으로 넘어가 볼까요? 역시나 제가 너무 사랑하는 밴드인 ASIAN KUNG-FU GENERATION은 영국 밴드 OASIS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자신들의 작품에서 드러냅니다. 오아시스 공연의 앞자리를 사수하려 몸을 던지고, 뒷풀이에서 품에 안기기도 한 고토 마사후미를 비롯하여 밴드 멤버 전체가 오아시스의 팬입니다. 그들의 기타 리프를 샘플링하거나 헌정곡에 가까운 노래를 썼으며, 곡을 커버하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예술과 레퍼런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술가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담으며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본 세대 자라서 자신의 창작물에다 보고 자란 작품을 반영하는 선순환이 현대 예술을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카우보이 비밥 또한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레퍼런스를 비롯하여 개인의 기호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그가 첫 번째로 총감독한 애니메이션이니 만큼 비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녹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차근차근 살펴볼까요? 우선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연출 특징은 2D 애니메이션에서 마치 영화와 같은 시퀀스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이 특징은 카우보이 비밥에서도 잘 드러나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이 비밥의 매력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밥은 좀 더 명확한 형태의 영화 오마주가 깔려 있습니다. 바로 홍콩 영화입니다.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이 사용하는 무술인 절권도는 홍콩 액션 영화의 상징인 이소룡(브루스 리)의 무술입니다. 절권도의 특징인 간결하게 절제된 움직임과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타격은 비밥 1화를 틀자마자 상반신 탈의를 한 채 수련을 하는 스파이크에게서 바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커다란 매력 중 하나인 대인 격투 액션 외에도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의 흔적은 작품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당장 2화에서 등장하는 거구의 악역 압둘 하킴은 <사망유희>에 등장하는 카림 압둘 자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같은 화에서 스파이크가 가게의 쌍절곤을 보고 '<맹룡과강> 모델이군'이라고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8화에서는 스파이크의 제자를 자처하는 등장인물에게 스파이크가 '물이 되어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소룡의 인터뷰에서 나온 전설적인 어록입니다. 이렇게만 봐도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이소룡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이 됩니다.
'범죄 조직에서 손을 씻은 주인공이 결국 과거와와 결판을 낸다'로 요약할 수 있는 비밥의 줄거리는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따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건 오우삼의 영화인데, 비밥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스파이크와 비셔스의 성당 결투 장면이 <첩혈쌍웅>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이미 유명합니다. 비셔스와 맞설 때마다 긴 기장의 롱코트를 입고 쌍권총을 사용하는 스파이크에게서는 <영웅본색>의 느낌을 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롱코트와 쌍권총 조합은 훗날 수많은 작품, 특히 <매트릭스> 등에게 계승되기도 합니다.
스파이크와 비셔스가 최후의 결투를 하는 장면에서 서로의 무기를 발로 밀어 교환하는 장면은 <영웅본색 2>의 오마주입니다. 모든 결판을 낸 주인공이 생사를 떠나 어딘가 초연하고 편안해 보인다는 점,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작품이 끝난다는 점은 영웅본색 2의 엔딩과 유사합니다. 다만 비밥이 단순한 홍콩 영화 오마주 애니메이션이 되지 않은 이유는 역시 SF,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세계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완구 판매를 위해 로봇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선라이즈에 입사하여 여러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기갑엽병 메로우링크>, <기동전사 건담 0083>,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가 감독 역할로 참여한 <마크로스 플러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로봇 애니메이션들은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미래에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카우보이 비밥의 세계관이 와타나베 신이치로라는 사람 안의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해온 것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비밥 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수준급인 전투기 액션은 그가 감독했던 마크로스와의 연관성이 잘 나타납니다.
마크로스 플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며 언급하고 싶은 또다른 비밥 속 레퍼런스는 미국 문화에 대한 것입니다. 많은 영화를 보며 성장한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의 레퍼런스보다도 미국 영화나 미국 대중 문화의 레퍼런스를 더 자주 사용합니다. 전투기 액션이라는 점에서 마크로스 시리즈와 미국의 탑건 시리즈는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인데,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참여한 마크로스 플러스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더욱 부각됩니다. 영상적 연출 외에도 성실한 모범생인 주인공과 악동 천재인 라이벌이 파일럿으로서 경쟁한다는 구도에서 탑건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카우보이 비밥에서도 미국 영화와 대중 문화의 요소를 정말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9화 <재밍 위드 에드워드>에 잠깐 등장하는 초자연현상 연구가 유리 켈러먼은 숟가락을 구부리는 묘기로 유명했던 초능력자 유리 겔라에게서 따왔습니다. 22화 <카우보이 펑크>에 등장하는 폭파범 테드 보어는 유나바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국의 테러리스트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연상시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23화 <브레인 스크래치>는 지금 봐도 무서울 만큼 기술 발달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면을 잘 그려내고 있는데, 여기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 닥터 론데스와 그의 종교는 미국의 사이비 종교 '헤븐즈 게이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주 마샬 애플화이트가 신도들과 함께 외부와 단절되어 집단 자살한 사건의 무대를 전자 공간으로 바꾼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18화 <10년 후의 나에게>에서 영화 마니아가 보고 있던 <베벌리힐스 아이들>이나 19화 <야생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타트렉>의 오마주 등 아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것들도 더러 있습니다. 20화 <피에로의 진혼곡>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와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25화 <더 리얼 포크 블루스>에서는 제트가 스파이크에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읊어 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일본뿐 아니라 서구권에서도 갖은 찬사를 받으며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나 홍콩 영화와 더불어 카우보이 비밥에 많은 영항을 준 것으로 보이는 미국 영화는 사이버펑크 SF의 교과서인 <블레이드 러너>입니다. 기술은 발달했으나 그에 따른 빈부 격차, 새로운 양상의 범죄며 고뇌 등으로 더욱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래 사회의 철학적 딜레마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에서 블레이드 러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주인공 데커드의 직업이 현상금 사냥꾼이었던 것과 스파이크의 직업이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것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미래 세계관을 바탕으로 홍콩 느와르적 요소를 얹어 오리엔탈리즘을 챙겨 가며 빚어진 것이 카우보이 비밥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의 캐릭터성은 일본의 전설적인 대배우 마츠다 유사쿠에게서 상당 부분을 차용했습니다. '곱슬머리에 사연 있어 보이고 양복이 잘 어울리는 사내'라는 마츠다 유사쿠의 이미지는 각종 매체 및 서브컬처에서 레퍼런스되어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나 <명탐정 코난>의 마츠다 진페이, <은혼>의 사카타 긴토키 등의 캐릭터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제가 최근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는 <데빌 서머너 쿠즈노하 라이도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네요.
하여간 요약하자면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자신이 처음 총감독을 맡아 지휘한 카우보이 비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십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첫 총감독이었던 만큼 본인만의 색채를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동시에 요구되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 너무나도 멋들어지게 카우보이 비밥이라는 하나의 아이콘을 만들어냈습니다. 과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감독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가 영화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음악의 활용도 카우보이 비밥의 특장점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락을 분리하여 따로 설명을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음악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감독입니다. 직전에 리뷰한 <사무라이 참프루>의 OST에 대해서도 길게 호평했지만, 카우보이 비밥에 사용된 음악들은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입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 본인이 비밥의 인기에 대해 음악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입니다. 그의 작품이 여전히 세련되고 좋은 분위기를 갖는 이유는 역시 이 OST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관통하는 요소기 때문입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학창 시절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를 동경해 음악을 공부한 전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소속된 것으로 유명한 그룹입니다. 배우다 그만뒀기 때문에 연주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식견이나 애정이 남다르긴 했으니 자신의 작품 속 음악에 그만큼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제목의 비밥은 즉흥 연주를 가장 큰 특징으로 갖는 재즈의 한 장르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조금은 충동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의 카우보이 비밥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밥 호의 동료들이 차츰 모이는 서사나, 한 에피소드를 이끄는 주요 등장인물이 있으며 에피소드가 끝나면 퇴장한다는 점에서 연주자가 추가되고 사라지는 즉흥 연주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좌우지간 비밥은 작품 이름부터가 재즈 장르인 만큼 재즈 음악이 자주 등장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즈의 전신이 되는 블루스도 엔딩 곡인 '더 리얼 포크 블루스'를 비롯하여 작품 곳곳에서 다뤄집니다. 그렇다고 이 두 장르만 다루느냐면 또 그것도 아닌 것이, 5화 <타락천사들의 발라드>나 7화 <헤비메탈 퀸>, 14화 <보헤미안 랩소디>, 15화 <마이 퍼니 발렌타인> 등의 제목이나 회차 속 OST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폭넓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OST는 단순히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이끄는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합니다.
https://youtu.be/0hfOyOBHIq4?si=QNjR7lRHB-eZpdcr
https://youtu.be/MxUbgEHP2Qg?si=FSPl7mYNJN3RupmC
전설적인 오프닝과 엔딩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직접 들어보시고 그 훌륭함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오프닝 <Tank!>는 한국 대중들에게도 익숙할 만큼 여기저기서 사용되었습니다. 외에도 <egg and i>나 <cats on mars>, 극장판에서 사용된 <what planet is this?!>는 다들 한 번쯤 들어 보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유명한 곡들 외에도 본작에 쓰인 OST는 2025년 현재 들어도 세련되게 느껴질 만큼 각종 장르를 아우르며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연주를 선보입니다. 1998년 당시에 애니메이션 음악이라 하면 단순히 만화 주제가를 넘어 유명 가수의 타이업으로 가수와 애니메이션 서로가 이익을 보는 등, 이미 일본 음악(J-POP)과 애니메이션은 긴밀한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상업 논리 아래 구성된 사업 시스템에 가까웠습니다.
애니메이션 OST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영역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카우보이 비밥의 영향이 분명 지대했을 것입니다. 특히 대단한 점은 애니메이션 음악에 있어 비주류였던 재즈를 주력으로 차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생소하지 않고 오히려 카우보이 비밥이라는 작품의 완성도와 매력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후 사무라이 참프루에 가서는 또 비주류 장르였던 힙합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OST를 만들어냈으니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선구안과 음악 활용 능력은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과 칸노 요코의 작곡 능력이 비밥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작품 외적으로 이야기한 것만 놓고 봐도 카우보이 비밥은 과연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명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첫 방영될 당시부터 카우보이 비밥이 모두의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각종 우여곡절이 가득했습니다. 작품 내적 분석에 앞서 카우보이 비밥의 험난했던 시작과 일본 심야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합니다.
애초부터 <성인들을 위한 하드보일드 SF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된 카우보이 비밥이었지만 이것은 스폰서 선라이즈의 생각과는 다소 맞지 않았습니다. 선라이즈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등을 비롯한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미디어 믹스나 완구 등을 통한 수익 창출을 추구하는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우보이 비밥은 완구 판매를 기대할 수 있을 만큼 메카닉 액션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애니메이션도 아니었고, 미디어 믹스를 통한 수익을 기대하자니 '성인들을 위한 하드보일드 애니메이션' 자체가 지금처럼 보편적인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첫 방영부터 카우보이 비밥을 방송하겠다는 방송사를 찾지 못해 고생을 했으며, 겨우 지상파 테레비 도쿄에서 방영을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심의 규제로 인해 각종 에피소드가 잘려나간 채 조기종영되었습니다. 포켓몬 쇼크를 비롯한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각종 사건사고로 사회가 민감해져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 약물이나 폭력 등의 소재를 다루고 있는 카우보이 비밥을 방영하기에는 방송사 입장에서도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조기종영으로부터 3개월 뒤 위성방성 WOWOW를 통해 삭제분 없는 26화 분량의 비밥을 송출하였고, 비로소 시청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이 훗날 제작하는 사무라이 참프루 또한 심야 편성 애니메이션이었으며 조기 종영이라는 아픔을 겪고 다른 방송국에서 온전히 방영될 수 있었다는 점을 보면 역시 명작은 어느 정도의 수난을 겪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카우보이 비밥은 성인이 주된 시청자층인 일본 심야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TV도쿄에서 1997년 재방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필두로 <이트맨> 등을 통해 가닥을 잡은 성인 대상 심야 애니메이션 시장에 완전한 불을 지폈습니다. 기존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던 청소년 대상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 하드보일드하고 노골적인 연출, 그러면서도 오타쿠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서브컬처적 작품성을 모두 갖춘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들의 집대성이자 대표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6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대히트 이후 2009년 <케이온!>을 비롯하여 각종 미소녀 애니메이션으로 심야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이 한바탕 바뀌기 전까지의 심야 애니메이션 중 당당하게 손에 꼽을 수 있는 대표작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스노트>나 <코드 기어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등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의 작품 외적 특징만을 다뤘는데도 글이 이만큼 길어졌습니다. 워낙 훌륭하고 탄탄한 완성도의 작품인 만큼 다루고 넘어갈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 리뷰를 읽어 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이제부터는 카우보이 비밥의 작품 해석과 더불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카우보이 비밥의 배경은 2071년이라는 먼 미래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인 지구를 벗어나 화성이나 금성 등 여러 행성에 테라포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모험이나 도전 같은 것에서 비롯된 진취적인 삶의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선 작품의 중요한 설정인 '위상차 공간 게이트'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위상차 공간 게이트는 우주선과 물자가 넘나드는 일종의 포탈 같은 개념입니다. 통상의 240배에 달하는 속도로 광년 단위가 기본인 우주 항해의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단축시켜 사람들의 생활 반경을 태양계 전체로 넓힐 수 있었던 대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발명의 과정에서 지구와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2022년, 지구와 달 사이 위상차 공간 게이트의 공명 테스트 도중 큰 폭발 사고가 일어나 달이 파괴된 것입니다. 조각난 달의 파편들은 지구 주위를 돌며 낙하하는 탓에 지구는 황폐화됩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 화성 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파편의 낙하로부터 안전한 지하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술의 발달은 인류에게 위상차 게이트와 타 행성 테라포밍이라는 축복을 주었으나 그 대가로 소중한 것을 받아갔습니다. 바로 인류의 고향인 지구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구 하나뿐인 위성인 달을 잃어버렸습니다. 모성(母星)을 잃어버린 인류, 달을 잃어버린 지구. 카우보이 비밥은 배경 설정부터 커다란 상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비밥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주인공들 모두 각자의 상실 이전에 이 가슴 아픈 공허를 전제로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괴로운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비밥의 주인공들이 어떤 상실에, 어떤 과거에 괴로워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봅시다.
주인공인 스파이크는 많은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스파이크는 과거 마피아 조직 '레드 드래곤'의 조직원이었으며, 숙적인 비셔스와는 등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비셔스의 연인인 줄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며 그녀와의 도피를 계획하게 됩니다. 조직의 임무 도중 죽은 걸로 위장해 줄리아와 함께 암흑가에서 빠져나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줄리아의 연인이었던 비셔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며 모든 일이 꼬였습니다. 믿었던 스파이크에게 뒤통수를 맞은 비셔스는 줄리아에게 '스파이크와 함께 죽기 싫으면 네 손으로 스파이크를 죽여라'라고 압박합니다. 최악의 이지선다에서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던 줄리아는 도피 당일 만나기로 했던 접선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홀로 도피한 것입니다. 남겨진 스파이크는 준비했던 계획에 따라 조직 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고 암흑가의 생활을 청산했지만, 줄리아가 자신을 두고 잠적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현실을 현실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던 마피아 생활 속에서 줄리아를 만나 삶의 의지, 즉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조직을 벗어날 계획까지 세웠으나 줄리아를 잃음으로서 삶의 의지 또한 다시 잃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스파이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습니다. 흉악범들 앞에서도 전혀 겁먹지 않으며 위험한 일에 몸을 던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선을 넘나드는 스릴 속에서야 간신히 의욕을 냅니다. 그 외의 상황에서는 마치 꿈 속을 사는 것처럼 현실감 없는 나날을 보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이건 나쁜 꿈일 뿐이다'라며 자기 최면을 겁니다. 괴로운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 보면 스파이크가 잃어버린 건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크게 본다면 스파이크가 상실한 것은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로인 페이 발렌타인 역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기 도박을 일삼고 돈에 집착하며 빚이 산더미인 그녀는 사실 20세기 출생입니다. 작중 배경이 2071년인 걸 감안하면 할머니나 다름없는 나이입니다. 1999년생인 페이 발렌타인은 20세 때 지구 주위에서 우주선을 타고 우주 유람을 하던 도중 엔진이 폭발하는 바람에 당시 의학으로서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의 부상을 입게 됩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냉동수면에 들어가 의학 발달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2068년에 해동되기 전까지 54년이라는 세월을 냉동인간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깨어난 뒤 남은 것이라곤 냉동수면 이용료로 인한 어마어마한 액수의 부채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비롯한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호사를 사칭한 사기꾼과 엮이는 바람에 빚도 더 생기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까지 더해 지금의 페이 발렌타인이 된 것입니다. 페이는 자신의 과거와 54년이라는 시간, 가족과 친구, 즉 이제껏 살고 있던 자신의 삶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과거에 약한 면모를 보입니다. 언제나 자주적이며 억척스럽고 뻔뻔한 페이 발렌타인이 거의 유일하게 무기력해지는 순간입니다.
스파이크의 든든한 동료 제트 블랙은 과거 태양계 경찰 소속으로 고향 가니메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맡게 된 수사 대상을 끝까지 추적하여 체포하는 훌륭한 경찰이었으나 어떤 범죄 조직을 쫓던 중 왼팔을 잃는 중상을 입고 은퇴하게 됩니다. 잃은 팔은 의수로 대체하였으나, 애인이 돌연 곁을 떠나버리는 악재까지 겹쳐 결국 제트는 고향 가니메데를 떠나 현상금 사냥꾼으로 전업하여 살아갑니다. 제트 또한 경찰이라는 직업과 왼팔, 애인에까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스파이크나 페이와는 달리 제트가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조금 더 의연하고 강인합니다. 그러니 스파이크와 페이 같은 문제아들을 다루며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죠. 제트의 이 특별함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이야기하는 상실이란 분명 까마득히 먼 미래,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071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페이 발렌타인의 냉동 수면으로 잃어버린 세월 등은 아직 현대 과학 기술과 거리가 먼 만큼 우리로서는 가늠하지 못할 수도, 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우보이 비밥을 보는 시청자들은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상실에 몰입하고 공감합니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들의 결핍과 공허함이 우리 가슴에도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카우보이 비밥의 내러티브가 그만큼 시청자를 사로잡고 그 마음에 다가간다는 점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 이유를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그 이유란, 세기말 정서의 연장선이 여전히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비롯하여 각종 기술들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90년대 말은 꿈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편 어딘가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머지않아 운석이 충돌한다는 종말론이 퍼진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외에도 각종 괴담이 성행하였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건 밀레니엄 버그입니다. 99년에서 00년도로 넘어가며 컴퓨터의 이진법이 이것을 잘못 인식해 오류를 일으켜 각종 사회 대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당연시되는 컴퓨터 기술이 당시에는 공포를 유발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그 시대의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기술 발전은 분명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혁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삶의 양상 변화나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발전하는 기술이 오히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기계화가 진행되던 당시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를 통해 비판한 것처럼 근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90년대 말은 종말론에 더해 이러한 정서가 절정에 달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 발달한 문명과 그 이기를 한껏 묘사하면서도 그 부정적인 이면을 다루는 걸출한 SF 애니메이션이 여럿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SF 애니메이션 역시 미래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곧잘 묘사하곤 했으나, 그것은 발달된 미래의 기술 그 자체로부터 초래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래 기술은 긍정적인 형태로 그려져, 그런 어두움 속에서 로봇 등의 형태로 나타나 인류를 구원하는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세기말에 접어들며 이러한 희망적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인간 소외나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는, 기술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냉정하고 음울하며 디스토피아적인 정서는 새천년의 도래와 더불어 기술 혁신들이 우리 삶을 더욱 깊게 파고들며 자연스럽게 걷혔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마어마한 기술의 집약인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고려할 만큼 우울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자동화 산업, AI 등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인간 소외나 공허감 등의 결핍을 완전히 해소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술은 발달했으나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비밥 속 등장인물들의 삶처럼 어딘가 텅 빈 것만 같고, 치열한 동시에 팍팍하며 건조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AI로 인해 줄어드는 일자리나 정보의 과다인 SNS 속에서 피폐해지는 마음에 대해서는 현대 사회를 사는 누구나가 고민을 해 봤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형태만 조금 바뀔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인류 본연의 슬픔을 세기말 감성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한, 현대인이 계속 안고 가야 할 마음의 공허와 결핍에 여전히 카우보이 비밥의 감성은 맞닿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무수한 혁신이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결코 온전히 메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구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카우보이 비밥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흐르든 비밥은 우리 마음에 다가서는 매력을 가진 작품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편 '괴로운 과거와 상실'이란 것은 본작을 관통하는 음악인 재즈, 그리고 블루스에게서도 뗄 수 없는 요소입니다. 현대 음악의 역사란 흑인 음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힙합과 로큰롤,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가스펠까지 모두 미국의 흑인들에게서 태어난 음악 장르입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미국으로 강제 이주당한 흑인 노예는 200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서부, 남부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덥고 습했던 남부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북부와는 달리 여전히 농업 중심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목화입니다. 당연하게도 흑인 노예의 몫이 된 목화 농업은 굉장히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 고된 일의 무게를 견디고자 부르던 노동요에서 발전한 것이 블루스입니다. 고통과 슬픔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 주는 음악의 순기능이 그들을 지탱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노예 해방 이후에도 고향을 잃은 채 미국 땅을 전전하던 흑인들에게는 팍팍한 삶과 인종차별이라는 괴로운 일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아픔을 견디는 동안 블루스로부터 파생된 음악 장르가 바로 재즈입니다. 이후 블루스에서 발전한 리듬 앤 블루스로부터 로큰롤이 시작되는 등 우리가 아는 현대 음악 장르들이 펼쳐집니다. 카우보이 비밥을 꿰뚫는 두 음악 장르가 고향과 기존의 삶을 잃어버린 흑인 노예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작품 전반에 깔린 음악부터가 상실을, 괴로운 과거를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카우보이 비밥은 작품 속을 넘어 현실의 우리 삶에도 산재해 있는 상실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란 아픈 과거에 발목을 잡혀 그치고 마는 것도 아니고, 끝없는 상실의 연속도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이어지는 비밥 호의 여정은 과거가 아니라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현실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시사하고자 하는 걸까요?
괴로운 과거와 벗어날 수 없는 상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인 삶을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명료한 해답이 있습니다. 파이어 펀치를 리뷰하며 언급했던 <시지프 신화>입니다. 바위를 계속 밀어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가 행복하리라 상상하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내던져진 삶에 맞서는 가장 훌륭한 형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겠지만 그 무수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무언가 발견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은 바람이 시원할 수도 있고, 어느 날은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경치가 무척이나 벅차오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바위가 평소보다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나날들을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면 틀림없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어느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카우보이 비밥의 등장인물들 역시 그렇습니다. 스파이크는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한 채 표류하듯 살고 있으며, 페이는 잃어버린 과거에 얽매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삶 자체를 가벼이 여기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밥 먹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현상 수배 범죄자들을 쫓고, 카지노에서 한바탕 승부도 해 보고, 식대가 부족해 고기 없는 고추잡채만이 식사로 나오더라도 악착같이 먹습니다. 옴니버스 속 조연들 또한 앞서 말한 상실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카우보이 비밥 속 인물들은 우리를 울고 웃게 하는 한편 그 자신들도 어딘가로 나아갑니다.
스파이크는 치열한 삶을 이어간 끝에 그토록 찾아 헤맸던 줄리아와 재회하게 됩니다. 마침내 만난 줄리아는 스파이크와 마지막까지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좋은 꿈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비셔스가 보낸 레드 드래곤의 조직원들과 맞서며 도망치던 도중, 줄리아가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살아간 끝에 원하던 것과 맞닿을 수는 있었지만, 괴로운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은 스파이크는 결국 줄리아의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살아 있는 현실을 꿈이라고 생각한 스파이크와는 달리, 줄리아는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죽음의 순간에 스파이크를 향해 '이건 꿈이죠?'라고 묻습니다. 바로 그 말이 꿈 속을 살던 스파이크를 다시금 현실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억척스럽고 강인하게 살아간 페이는 그 끝에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을 잃기 전 자기 자신에게 소포로 보냈던 비디오 테이프가 긴 시간을 지나 도착한 것입니다. 영상 속 어린 시절의 페이는 밝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어떤 얼굴로 어떤 직업을 가진 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미래의 자신에게 막연한 응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난 이제 여기 없어. 하지만 오늘의 나는 여기서 널 계속 응원하고 있어. 단 하나뿐인 나에게...
마주한 과거는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기 도박의 달인이자 빚을 갚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현상금 사냥꾼인 자신과 비디오 속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달라서 비롯되는 괴리감, 그리고 이 비디오를 보고도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페이를 울릴 만큼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디오를 받아 본 것을 통해해 페이는 분명한 인간적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어떠한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작에서 발랄함과 코믹함을 책임지던 천재 해커 소녀 에드워드는 비밥 호와 함께하는 여정 도중 자신의 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위상차 게이트 폭발로 지구 주변을 떠돌게 된 달 파편이 수시로 낙하하는 탓에 수시로 지형이 변하는 지구의 완벽한 지도를 그려내고자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아버지와의 만남은 에드워드로 하여금 페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한편 제트는 비밥 호의 선원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다른 멤버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고, 현상수배범의 정보를 수소문해 일감을 찾습니다. 인간 생활의 삼요소인 의식주에서도 특히나 가장 중요한 식, 요리 담당마저 제트입니다.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 멤버들에게는 통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제트를 구심점으로 삼아 비밥 호가 굴러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트는 누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자신의 현실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기에 아픈 과거와 마주해도 그것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제트를 돌연 떠났던 애인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모든 일을 먼저 나서서 처리하는 제트에게 점점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껴 떠났다는 그녀의 말에도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제트는 강인했습니다.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건으로 현상수배범이 된 그녀의 현 남자친구를 직접 붙잡고도 과거의 경찰 인맥을 동원해 옥살이를 최대한 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 에피소드의 말미에 전 애인이 남긴 회중시계를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그녀와의 아픈 과거를 털어버리는 제트의 모습은 정말 어른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성숙함을 바탕으로 제트는 훗날 마주하게 되는 자신의 왼팔 부상과 은퇴에 대한 진상에도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 제트의 왼팔을 저격해 뜯겨나가게 만든 건 그가 쫓던 범죄자가 아니라, 자신의 경찰 파트너였습니다. 고지식하고 정의로운 제트는 범죄조직과 유착이 있던 태양계 경찰 상층부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에 범죄자와의 추격전을 틈타 제트를 제거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과거 자신의 파트너와도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게 된 제트는 상대방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파트너는 애초부터 제트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그의 손에 죽을 작정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쥐고 있던 총에는 탄환이 한 발도 장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한때 가장 의지했던 동료를 죽였음에도 제트는 꺾이지 않습니다. 제트도 물론 비밥 호의 선원들과 함께하는 여정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괴로운 과거들과 마주하였으나, 가장 성숙하게 마무리를 지어보였습니다. 2071년의 의학 기술로 뜯겨나간 왼팔을 재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수를 고집하는 것은 제트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카우보이 비밥 속 인물들은 주어진 현실을 살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상실감이나 괴로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면한 삶을 의젓하게 살아나가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또한 이 먹먹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떠한 해답 내지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현재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과거를 마주하고 현실을 딛은 비밥 호의 선원들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결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냄에 따라 이제껏 계속됐던 비밥 호의 즉흥 연주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각 멤버들의 순서를 조금 바꿔서 그들이 얻어낸 결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페이는 과거의 자신이 보낸 비디오를 유심히 본 끝에 배경 속 장소를 유추해냅니다. 영상이 촬영된 장소인 지구의 싱가포르에 다다른 페이는 54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된 자신의 옛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재회 이후 비밥 호로 돌아와 홀로 샤워를 하던 도중 자신의 과거를 모두 떠올려내게 됩니다. 가장 먼저 과거의 자신이 살고 있던 집터로 달려가 보지만 그곳은 어떤 건물의 흔적조차 남겨져 있지 않은 폐허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방이 있던 위치로 가서 침대 형상의 사각형을 그리고는 그 안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페이의 모습은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하지만 괴로운 과거라고 해서 마주보지 않는 것이 과연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이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려 노력하고 그 끝에 마침내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전히 사기 도박과 돈에 집착하는, 냉동 수면 이후 만들어진 자신으로만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야 에드에게 아주 중요한 조언을 해 줄 수도 없었겠죠. 마지막 결전을 위해 떠나는 스파이크를 이전과는 달리 강하게 붙잡고 막아설 수 있었던 것도, 고백에 가까운 형태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덕분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기억을 되찾은 페이로부터 중요한 조언을 듣습니다. '네게도 있어야 할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찾아가는 게 좋아. 그게 가장 좋은 거니까'라는 조언과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에드워드는 비밥 호에서 내리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위험천만한 지구 속에서 완벽한 지도를 그린다는 꿈을 좇는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또 지도를 그리겠다며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를 다시 찾아 함께 살고자 떠나는 것인지는 작품 속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뜻이 맞는 천재견 아인과 함께 비밥 호에서 내려 석양이 깔리는 황무지를 걷는 에드워드, 그리고 그들 몫의 식사로 준비한 삶은 계란을 착잡한 표정으로 꾸역꾸역 입에다 밀어넣는 스파이크와 제트는 카우보이 비밥 속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BGM으로 깔리는 명곡 <Call me>는 상황과 어우러져 더욱 아련하고 씁쓸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에드워드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아직 어리기에 극복해야 할 과거도, 괴로운 과거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설령 있더라도 낙천적이고 씩씩한 그 자신의 성격 덕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에드워드야말로 비밥의 시청자들이 나아가야 하는 삶의 형태와 가장 근접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어 청산하여야 할 만큼 지긋지긋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는요. 마주봐야 할 과거보다도 맞이해야 할 내일이 훨씬 많은 에드워드처럼 우리 또한 무수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너무나도 흥겨웠던 즉흥 연주로부터 과감히 빠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계속되어서는 즉흥 연주라고 할 수도 없으며, 즉흥 연주가 갖는 매력을 모두 잃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는 그간의 여정에서 자신의 삶의 형태를 직접 규정하여 스스로의 발로 걸어나가는, 아주 훌륭한 결실을 맞이했습니다. 비밥을 시청하는 우리도 에드워드가 한 것처럼 비밥에서 얻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제트는 그 의연함과 강인함을 바탕으로 최후의 싸움을 앞두는 스파이크를 지탱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를 막아세우고자 하는 마음 역시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스파이크가 과거를 마주하여 그것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현실을 살 수 있게끔 돕고자 하는 생각이 끝내 더 우선됐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스파이크에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싸움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끝내 스파이크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알고는 그에게 자신의 제일 가는 요리인 고추잡채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스파이크가 이야기하는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줄거리를 듣고 함께 웃습니다. 자신 삶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과거를 온전하게 끝맺기 위해 싸움에 나서고자 하는 스파이크를 긍정하고 이해해 준 것입니다.
허공에 권총까지 쏴 가며 스파이크를 막아서던 페이와는 달리 묵묵하게 제트는 스파이크를 믿고 기다립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우정과 파트너십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제트처럼 의젓하게 과거와 현실을 모두 이겨낸다면, 스파이크를 지지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고뇌하는 누군가를 지지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간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상호작용 중 하나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스파이크는 비셔스가 장악한 레드 드래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비셔스와 결판을 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살아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로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직시할 수 있게 된 과거를 완전히 끝맺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은 비셔스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앞으로 자신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확신을 얻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밥 호를 나서기 직전 스파이크는 제트에게 '여자를 위해서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스파이크는 그 질문에 '죽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스파이크가 줄리아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비셔스에게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엔딩 곡인 <더 리얼 포크 블루스>의 가사 중 '한 눈으로 내일을 보고 한 눈으로 어제를 바라보고 있어'라는 부분 그대로, 스파이크는 그 두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현실을 꿈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었죠. 하지만 비셔스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뒤 계단을 내려오는 스파이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통해 세상을 겨눕니다. 작중 스파이크는 레드 드래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하는 사고에서 부상을 입어 오른쪽 눈을 인공 안구로 이식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왼쪽 눈으로는 과거를 보고, 오른쪽 눈으로는 현재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덧붙입니다. 물론 스파이크는 현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지만서도 현실감을 거의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었으니 전부 맞는 말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과거만을 바라보던 왼쪽 눈을 감고, 현재를 바라본다고 한 오른쪽 눈을 뜨며 미소짓는 건 특별합니다. 스파이크가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쟁취해낸 현재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직시하며 만족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로 스파이크는 목숨을 잃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마저도 전혀 아깝지 않아 보이는 멋진 웃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을까요? 스파이크가 그토록 멋지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실의 시대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은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과거를 마주하고, 그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결실임을 스파이크를 통해 전달합니다.
결국 카우보이 비밥이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말 것,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이 현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내일까지 온전히 쟁취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품성이 어마어마하게 깊은 만큼 각종 다양하고 심층적인 해석들 가능하며 충분히 세간에 존재하고 있으나, 저는 역시 이 정도의 메시지가 가장 담백하며 잘 와닿는다고 느낍니다. 해석이 어떻든 카우보이 비밥은 마음의 공허를 안은 채 90년대 말이라는 시대를 부유하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90년대를 넘어 2020년대인 현재까지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다루고 있는 논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뇌일 것이기 때문에, 카우보이 비밥은 앞으로도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에 대한 분석을 얼추 마친 이 시점에서 요약해 보자면, 카우보이 비밥은 90년대로부터 후대에 보내는 가장 아름다운 연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대가 품고 있던 희노애락과 거기서 비롯되는 감성을 너무나 잘 표현했습니다. 추측하건대 90년대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 과거에 대한 그리움, 건조한 현실에서 비롯되눈 공허감 등이 그 짧은 시간 속에 아주 강한 농도로 혼합되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이 세기말이 지닌 특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던 90년대처럼 카우보이 비밥도 여러 요소들이 섞여 있습니다. 모던하면서도 에스닉하고, 세련된 한편으로 어딘가 아련합니다. 우주선이 보편화된 미래 세상임에도 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삶은 하루하루 연명하는 듯하여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 복합적 감성의 대표적인 용례로 래핑 불을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스파이크와 제트는 곤궁에 빠질 때 해답을 찾기 위해 곧잘 인디언 래핑 불을 찾아가 점을 보곤 했습니다. 이 래핑 불은 큰 중역을 맡게 되는데, 본작 최후반부에서 스파이크의 생사를 묘사할 때 별점을 치는 래핑 불의 입을 빌려 인디언 식으로 표현합니다. 작품에서 스파이크의 생사에 대해 말로 언급하는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합니다. 작품의 클라이맥스, 시청자들이 가장 몰두하는 요소를 전달하는 그 순간을 세련된 미래의 서사와 아련한 과거의 양식을 공존시키는 것으로 너무나 인상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한없이 멀리 있는 듯하면서도 가깝게 느껴지는 세상을 그려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카우보이 비밥이 명작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길었던 카우보이 비밥 리뷰도 이쯤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다루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두 활극을 연달아 리뷰한 것은 역시 두 작품이 엄청 닮아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프루를 리뷰하는 동안에는 '비밥이라면 이런 느낌이었지'하는 생각과 함께 글을 썼고, 비밥 리뷰를 쓰면서는 '참프루에서는 이런 느낌이었는데'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어느 한 쪽에 대해서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한 쪽에 대해서도 떠오르니 두 작품을 이어서 리뷰해야 최대한 양쪽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워진 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본 리뷰가 만족스럽냐고 자문한다면 저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도전적인 자세로 순간에 꽂힌 느낌을 계속 끌고 가고자 밤을 꼴딱 새면서 글을 썼는데, 카우보이 비밥과 서브컬처 리뷰란 이런 일필휘지의 감성만으로는 도무지 남들 앞에 내놓을 만한 수준으로 다듬기 어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 쓰지도 못하고 또 며칠에서 몇 주를 질질 끌었을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마구 몰두해 보는 건 정말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글에 대한 저 자신의 평가를 조금 정도는 더 높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저는 정말이지 과거에 휘말린 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이불킥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퍽이나 잦게도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이나 내 자신의 한심한 실수, 또 남에게 저지른 잘못 따위가 떠올라 몸둘 바를 모르겠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괜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몸을 마구 움직이거나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유치한 일이지만 그것 또한 저라는 사람의 일부이니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개선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본 리뷰를 작성하며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제목에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저 자신, 나아가 주변 사람, 또 세상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거로부터든, 현재로부터든, 미래로부터든 말입니다.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보낸 뒤에는 차마 답장을 읽을 용기가 없어 늘 닫아 둔다거나, 제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하기만 했던 지난 날의 부끄러운 기억들을 똑바로 마주하려 합니다. 거기서 하다못해 반면교사로 삼아서라도 저를 개선시킬 점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겠죠. 그렇게 하나하나 고쳐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의 어떤 과거와 마주하더라도 스파이크처럼 멋들어지게 웃으며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좀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믿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을 리뷰하는 건 역시 장대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 있어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명작이며 수많은 팬들, 또 그 머릿수만큼의 해석이 있다 보니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제 나름의 방식으로 끝맺긴 했네요. 남의 잘 쓴 글에 견줄 생각보다도 나 자신이 봤을 때 부끄러운 구석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만한 명작을 다뤄 봤으니 앞으로도 대소 불문 여러 서브컬처를 다뤄 식견과 글솜씨를 늘린 뒤 언젠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리뷰를 하고 싶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오타쿠들의 성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규모와 거대한 팬덤을 지닌 작품이니 아무리 좋아해도 섣부르게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니만큼 때가 되었을 때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때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리로 힘있게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든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비밥을 리뷰하며 정말 인간적으로 많이 전진한 것 같습니다. 역시 제 인생 최고의 즉흥 연주입니다. 지금은 비록 끝을 맺었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서든 누군가가 먼저 악기를 켜기 시작하면 저 또한 끼어들어 한바탕 멋진 음악을 연주하고 싶습니다. 거기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영원한 상실의 시대 속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열정 가득히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멋진 연주를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v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