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 도전기
넌 여자가 왜 콧수염이 있어?
거침없는 남학생들은 여자가 왜 털이 있냐며 낄낄대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털이 많은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나한테 콧수염만 보였다. 나는 왜 여자에게 털이 있으면 안 되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냥 털이 많은 나 자신이 싫었다. 그 털들을 없애기 위해 별의별 걸 다 해봤다. 탈색 약을 사서 염색도 해보고 엄마 몰래 제모기를 사서 제모도 해봤지만 털들은 다시 조용히 머리를 내밀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릴 땐 항상 안쪽 팔이 보이도록 뒤집어 놓았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필두로 많은 여성들의 가치관이 변했다.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은 치워버리고 나를 위한 삶, 내 몸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와이어 속옷을 찾던 여성들은 몸이 편한 브라렛을 입었다.
그리고 내 가치관도 변했다. 그러자 의구심이 들었다. 왜 남자들은 있어도 되는 다리털, 겨드랑이 털, 콧수염이 여자들은 있으면 안 되지?
겨드랑이 제모 5회 29900원!
여름이 되면 온갖 부위에 대한 제모 광고가 쏟아진다. 매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여성상은 털 없는 매끈한 몸매라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기꺼이 29900원을 지불한다. 여성은 매체와 상품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악순환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털 따위 신경 쓰지 말자고.
하지만 나는 탈코르셋에 실패했다. 한 번은 다리털 제모를 하지 않고 외출을 했는데, 누군가 내 다리를 볼까 봐 두려웠다. 지하철에선 다리가 안 보이도록 다리를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겨드랑이 제모를 안 한 날이면 내 겨드랑이가 보일까 봐 온종일 팔을 몸에 딱 붙이고 다녔다. 이미 세뇌당해버린 나는 코르셋을 벗을 수 없었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세상이 나에게 던지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탈코르셋을 포기해버렸다. 사람들은 중학교 남학생들보다 성숙했을 뿐 그들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나 혼자 세상과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못난 사람이 될 뿐이라서, 그래서 다시 주섬주섬 코르셋을 입었다.
우리는 많이 변해왔지만, 세상을 바꿔왔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