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토크

사랑의 영원함에 대하여 <이터널 선샤인>

by 세비지

로맨스 장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터널 선샤인>을 외면해왔다. 영화 플랫폼에서 이 영화를 재생했다가 5분 만에 끄기를 반복한 것이 20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문득 로맨스 영화가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고, 드디어 이 작품을 끝까지 보게 되었다.

M0020054_eternal_sunshine_1[S800,800].jpg

미셸 공드리 감독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기묘한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다. 플롯의 거의 결말 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데, 조엘(짐 캐리)이 침대에서 일어나 우울하고 건조한 겨울 햇살 속에 머무는 모습이 담긴다. 서정적이고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차에서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전혀 다른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녀는 밝고 명랑하며 거침없이 조엘에게 다가간다. 조엘은 점점 그녀에게 끌리게 되고, 두 사람은 심야의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즐긴다. 하지만 새벽녘, 클레멘타인이 칫솔을 가지러 가겠다고 말한 후, 조엘은 그녀의 집 앞에서 낯선 청년과 마주한다. 청년은 조엘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이 질문과 함께 오프닝 시퀀스는 끝나고 본격적인 플롯이 전개된다.

BDvXBv-4L8Pm5CBGjL32vuEjc3U.jpeg

찰리 카우프먼의 비선형적 각본은 시간의 흐름을 교묘하게 뒤틀어 놓는다. 표면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은 이 구조가 단순한 연대기적 서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만남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첫 번째 만남이 아니라, 기억을 지운 후 운명적으로 다시 재회한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이다.


기억 삭제 과정을 표현하는 미셸 공드리의 연출은 특히 인상적이다. 현실과 기억이 뒤섞이는 장면들은 디지털 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 세트와 카메라 워크를 활용한 아날로그적 기법으로 구현되었다. 책장이 사라지고, 얼굴이 지워지며, 공간이 왜곡되는 장면들은 마치 꿈을 보는 듯한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EC%9D%B4%ED%84%B0%EB%84%90%EC%84%A0%EC%83%A4%EC%9D%B8_%EB%A9%94%EC%9D%B8.jpg
M0020057_eternal_sunshine_14[W578-].jpg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99AF6633598B3D911E

이 영화는 '영원함'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원함'의 측면에서는 기억이라는 물리적인 요소를 탐구하는 동시에, 기억을 지운다 해도 결국 같은 감정과 관계로 회귀하는 인간의 본성을 조명한다. 또한, '사랑'의 측면에서는 치유의 과정을 세밀하게 다룬다. 조엘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외로움을 클레멘타인을 통해 치유받고, 그녀의 결점을 받아들이며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다.


영화는 여러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정체성은 기억에 의해 결정되는가?", "고통스러운 기억도 우리를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인가?",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결점과 상처를 포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 전개 속에서 자연스럽게 탐구된다.


결국, 이터널 선샤인은 타인의 특성과 상황에 대한 재구성, 그로 파생된 감정과 기억의 복합적인 작용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사랑이 단순히 좋은 순간들만이 아니라 상처와 아픔까지도 포함하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 인간의 감정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고민하게 되며, 사랑과 기억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8eeefb8aa696d5b6c0d5ec2d7eb8ddd7.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도덕적 '관종'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