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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

무자비함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

by 세비지

가장 잔인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잔인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빨간색이나 검은색이 스치고 지나간다.

피와 어둠, 살덩어리. 어쩌면 '혼란' 같은 단어도 함께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장 잔인한 것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무(無)'의 형태가 아닐까.

존재했으나 사라진 것,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는 것,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나지 않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존재했으나 바스러지게 만들어 형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나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잊혀진다. 누군가의 기억에 내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했던 순간도, 뜨겁게 꿈꾸던 날들도 결국 희미해진다. 기억 속에서 뜨거웠던 순간들이 사라진다면, 그 순간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은 무자비하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존재는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영원할 것 같던 행복도 몇 분 뒤, 혹은 몇 년 뒤에 사라진다. 뜨거운 사랑도 어느새 '내가 그랬나?'라는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잊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 순간 이름조차 흐릿해진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새로운 희망이 자라난다. 잊혀지기에 살아갈 수 있고, 사라지기에 새로운 것이 올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을 원망하면서도, 시간이 흐르기를 바란다. 시간은 가장 잔인한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우리가 시간의 잔인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멈출 수 없으며,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절대자 앞에서 무력한 존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를 떠올려본다. 폐렴에 걸린 존시는 자신의 생명이 창밖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노화가가 담벼락에 그린 그림이었다. 존시는 그 '시간을 거스른 잎새'를 보며 살아갈 의지를 되찾았다. 노화가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예술을 창조했다. 그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시간을 멈추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잔혹함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려 한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추억을 간직하며 시간을 붙잡으려 한다. 완전히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 흔적만큼은 남기려 한다.


사계절이 변하듯 우리의 삶도 변한다. 화려했던 봄꽃은 지고, 푸르렀던 여름 나무는 가을에 붉게 물들었다가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로 남는다. 그러나 다시 봄이 오면 새순이 돋아난다. 자연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환하며 생명력을 유지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청춘은 지나가고 중년이 오며, 노년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지만, 또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젊음의 열정은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지혜와 경험이 쌓인다.


결국 시간의 잔인함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고 생각하면 두려움과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을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축복이 된다.


매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자.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며,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변화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진화한다.


시간의 무자비함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영원은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더욱 깊이 느끼고 사랑하게 된다.

시간은 우리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며, 삶의 의미를 찾게 한다.


마치 '마지막 잎새'처럼, 우리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하며 살아간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의미를 새긴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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