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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Mar 22. 2021

재생목록에 추가 / 박브이

플레이리스트


  '배경이 되는 시티팝', '어딘가 새로운 재즈', '장르로서의 아이돌', '인디와 인디 사이', '답지 않은 J POP’...


  지금 이용하고 있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나름대로 정리해 둔 재생목록들의 이름이다. 한 곡 한 곡 살펴보니 여러 목록에 동시에 들어가 있는 곡들도 있고, 이 노래가 왜 여기에 있지 싶은 곡들도 있다. A, B사이드를 합쳐 90분이었던 카세트 테이프, 80분이었던 CD, 그나마 여유로웠던 256MB의 MP3 플레이어를 사용했던 시절과 달리 요즘은 목록에 새로운 노래를 더할 때 어떤 곡을 뺄 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씩 정리가 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계속 팽창하기만 하는 최근의 재생목록에 비해, 고민이 담긴 갱신을 거듭하던 옛날의 재생목록이 스스로의 취향을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그저 더해지기만 하는 나의 재생목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시간을 거슬러 노래를 찾기 위해 시장을 전전하던 때가 있었다. 요란한 스티커가 붙어 있는 'X세대 최신가요' 따위의 테이프를 시장에서 사다가 마음에 드는 노래들을 옮겨 닮았다. 빨간 동그라미 버튼을 눌러대며 나름의 순서를 갖춘 믹스테이프를 무겁고 커다란 플레이어에 넣어 듣고 다니다가, 한 두 달이 지나면 새 테이프를 만드는 식이었다. 버스를 타고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떠나야 될 때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노래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섞어 따로 테이프를 만들어 기사님께 건네 드렸다. 친구들은 아는 노래를 다 같이 따라부르며 들뜨는 마음을 더욱 높이 띄웠고, 나는 다음 노래가 뭐였더라 생각하며 괜히 좋아지는 기분을 조용히 곱씹곤 했다.


  싸이월드를 이용했을 적에는 미니홈피를 재생목록처럼 쓰기도 했다. 스킨이나 미니미를 꾸미는 것 보다 배경음악을 달아두는 데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문화상품권이 생기거나 하면 도토리를 충전해서 노래들을 잔뜩 사들였더랬다. 처음에는 유행을 따라 누구나 좋아할만한 노래를 올려 두었었지만, 나중에는 내 미니홈피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탐이 났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혹은 심야에 라디오를 듣다가 좋은 노래를 만나면 적어 두었다가 목록에 추가했다. 빌보드나 오리콘 같은 해외 차트를 기웃거리기 시작하기도 했다. 음반의 타이틀곡만이 아닌 수록곡까지 챙겨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재밌는 곡들이 많아 노래를 들으러 미니홈피에 접속한다는 말에 괜히 기쁜 표정을 가까스로 숨기며 더 좋은 노래를 많이 올려두겠다고 대답했던 적도 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면서 잠시 맡았던 복합문화공간 겸 술집에서는 신청곡을 받아 틀었다. 손님이 신청한 노래 속에서 좋은 노래를 만나게 되는 일이란 참으로 근사한 순간이었다. 이런 저런 노래를 틀다보니 각양 각색의 글씨로 쓰여진 신청곡 종이를 보면 어떤 노래를 좋아할 지 대충 짐작이 되기도 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갈무리해 두었던 곡을 신청곡들 사이에 섞어 틀었을 때 반응이 좋으면 노래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어떤 손님은 음악이 너무 좋다며 술을 더 시키기도 했고, 춤 동아리 손님들은 일어나서 느낌있는 몸짓을 뽐내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과 나눈 이야기 못지 않게, 어떤 리듬으로든 맞춰 돌아가주던 미러볼과 함께 노래를 틀던 순간 순간을 가끔씩 꺼내 볼 때가 있다.


  버스에서 틀던 믹스테입에,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에, 가게에서 받았던 신청곡 종이에 있던 곡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여러 재생 목록 여기저기에 남아 한 줄 씩을 맡아주고 있다. 그렇게 계속 목록에 추가되어 온 노래들 중 어느 곡도 그 한 곡만으로는 스스로의 취향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취향이란 모름지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바라보는 방향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재생목록에 추가되어 온, 그리고 앞으로 추가될 모든 곡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내 취향을 부족함 없이 보여줄 수 있을테다. 잠시 목록에 머물다 빠지게 된 노래들의 목록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답 대신 재생목록 중 하나를 보내주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취향을 일부라도 가장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에 그나마 가까울 것이므로.


  오늘도 재생목록에 노래 몇 곡을 추가했다. 스스로를 설명해 줄 몇 줄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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