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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12. 2021

라멘을 끓이며 / 박브이

공간

  신주쿠와 시부야 사이, 요요기의 철도 근처 맨션 앞에 세워둔 검은색 자전거에 몸을 얹는다. 페달을 밟아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이 있다. 야마노테선 전철이 지나가는 고가를 지나 센다가야 역을 뒤로하면 오른쪽에는 도쿄 체육관이, 이어서 국립경기장이 보인다. 그대로 이어진 가이엔에서 아오야마로 빠져나오는 길에는 곱게 뻗은 은행나무가 300미터가 넘게 줄지어져 있어서 그 사이를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아오야마 잇쵸메 역에서 우회전을 해서 쭉 내려가다보면 오른편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고, 왼쪽으로 휘어진 길을 조금 더 가면 먼듯 가까운듯 모리타워가 보이기 시작한다. 경사가 조금 급한 오르막길을 이겨내면 어느새 모리타워와 롯폰기 힐즈가 나오고, 교차로에 몰리는 차들과 섞여 그대로 긴 내리막 터널로 들어간다.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당기면서 TV아사히와 츠타야를 지나, 마트가 있는 샛길로 들어가면 아자부주반 상점가다.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상점가의 한 가운데 쯤으로 가면 초록색 산 모양의 로고와 함께 'AFURI’라고 쓰여진 간판이 있다. 언뜻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느낌이지만 의외로 라멘집이고,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서 지낸 1년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기도 하다.


  병역을 마치고 부랴부랴 떠나 온 일본에서의 첫 달은 생활이라기보다는 관광이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서 들어간 하라주쿠의 아후리에서 먹은 '유즈 시오 라멘'은 매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인 맛이었다. 가게를 나서면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공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고, 사진을 찍어두었다가 집에 가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외국인도 괜찮냐는 질문에 흔쾌히 면접을 한 번 보자는 답변이 돌아왔고, 나카메구로에 있는 지점에서 면접을 본 다음, 아자부주반에 있는 지점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모든 만남이 그렇듯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 또한 이런 저런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처음에는 설거지를 비롯한 온갖 잡무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조금씩 일의 흐름이 눈에 보이고 접객에도 자신이 붙으면서 홀 업무를 맡게 되었고, 가끔 라멘에 토핑을 올려서 손님에게 완성된 한 그릇을 전해주는 역할도 맡게 되었다. 마지막 목표는 스프의 온도를 관리하면서 맛을 조절하고, 손님의 기호에 맞춰 면을 삶아내는 '멘바'라는 포지션이었다. 최대한 빨리 멘바에 서고 싶어서 가게에서 쓰는 조리도구와 똑같은 것을 구해다가, 면 삶기에 중요한 물 털어내기나 면을 가지런히 스프에 담아내는 것을 일을 마치고 틈틈이 연습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 2개월 정도 되었을 때, 본사의 조리 총괄 담당자가 내가 삶은 라멘을 맛보고는 손님에게 내어도 괜찮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뿌듯한 순간을 뒤로하고 하루에 2, 3백 그릇의 라멘을 접시에 담아내게 되었다.


  가게에서 듣던 많은 소리를 기억한다. 아침에 출근을 하게 되면 차분하게 오픈을 준비했다. 서걱서걱 재료들을 알맞은 크기로 썰고, 고기를 구울 때 쓸 숯에 타닥타닥 불을 붙였다. 간단히 회의를 하고 '준비중'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영업중'으로 돌려 놓으면 땡그랑 하고 문에 걸어 둔 종소리와 함께 하나 둘 손님이 들어왔다. 피크 시간에는 주문을 주고 받는 직원들의 목소리, 면수와 육수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후루룩 손님들의 식사 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마감할 때가 되면 손님이 없는 텅 빈 가게의 고요함을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 하는 소리와 시답잖은 잡담 소리로 덮었다. 정산을 위해 발권기 금고를 열면 짤그랑 짤그랑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로 그 날의 매출을 가늠하곤 했다.


  16자리로 하루 수백명의 손님을 바쁘게 받아내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함께 일한 동료들의 몫이다. 당시에는 얼마 없던 외국인, 그 중에서도 한국인 스탭을 살뜰히도 챙겨 주었다. 새벽 6시에 마감을 하고 나면 맥주나 음료수 내기를 해서 Z에서 수다를 떨며 마시기도 했다. 반기에 한 번씩 전 지점의 직원들이 한 데 모이는 전체회식인 'Z회'나, 가끔식 일손이 부족한 지점에 헬퍼로 가서 친해진 다른 지점의 직원들도 있었다. 트렌디하고 세련된 이미지 때문인지 댄서나 DJ, 연극배우, 코미디언 등 예능계의 일을 겸해서 하는 스탭들도 많아서, 쉬는 날에는 스탭이 참가하는 공연이나 파티에 우르르 몰려 가기도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서 다들 어렵게 시간을 맞춰 송별회를 열어 주었는데, 전 지점의 직원들의 짤막한 인사말이 적힌 하얀 운동화를 선물로 받았다. 가끔씩 신발을 꺼내서 거기에 적혀있는 이름들과 얼굴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3년 전에 도쿄에 들렀을 때 아후리 아자부주반점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스탭들은 거의 없었고 동료에서 친구가 된 이들과 근처에서 밀린 근황을 술잔과 함께 나눴다. 나중에는 당연한 일인듯이 다 같이 가게로 향했다. 못 보던 조리기구들이 좀 들어오긴 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영업이 끝나고 아직 가게에 남아 있던 옛 동료의 권유에 주방으로 들어가서 라멘 한 그릇을 삶아 보았다.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그릇에 소스를 넣고, 펄펄 끓고 있는 면수에 면을 풀어 넣는다. 면이 삶아지는 동안 육수를 그릇에 부어 소스가 잘 섞이도록 저어준다. 30초가 지나면 면이 담긴 채반을 들어 면이 뭉개지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두 세 번 세차게 물을 털어준다. 면을 육수가 담긴 그릇에 옮겨 담고 토핑이 잘 올라갈 수 있게 가지런히 정리해준다.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양의 토핑을 올려주면 완성. 잠깐이지만 일을 하던 당시의 나로 되돌아 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자리로 돌아와 맛본 라멘은 알맞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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