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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24. 2021

글씨는 사람으로 쓴다 / 박브이

습관



  얼마 전에 코인노래방의 영업 제한이 풀리면서 한 곡조 뽑아 볼 요량으로 예전부터 종종 가던 곳을 오랜만에 찾았다. 들어가려고 보았더니 입구 한 쪽 유리문에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었다. 영업을 하지 못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혹시나 영영 문을 닫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던 단골들이 하나 둘 붙여 두었던 모양이다.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의 포스트잇에는 ‘힘내세요’라는 응원부터 사장님과 가게에 대한 격렬한 애정 표현은 물론, 그 장소에 담긴 각자의 추억이 각각의 글씨로 꾹꾹 눌러담겨 있었다. 포스트잇을 써서 붙이던 이들이 지었을, 그리고 그것을 보며 적어도 하루는 더 견뎌낸 사장님이 지었을 표정을 상상하니 기분이 괜히 따뜻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쓴 글씨의 모양으로 그곳에 있었다.


  글씨를 잘 쓰는 편은 못 된다. 스스로 써 낸 무언가를 남들에게 보여줄 일이 많았던 학창 시절에도 글씨를 칭찬 받은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좀 더 성의 있게 글씨를 써 보라거나 깔끔하게 써 보라는 등의 지적을 받는 편이었다. 글씨를 잘 쓰는 것에 대한 대단한 동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정 이쁘장한 글씨가 필요하면 인쇄를 하면 될 것 아닌가란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도 보통 정도로는 써야되지 않나 싶어 방학 동안 펜 글씨 교본을 사서 연습을 해 둔다든가, 명필로 소문난 친구의 글씨를 유심히 보고 따라 써 본다든가 하는 노력을 가볍게 했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붓펜을 들게 되면서 ‘글씨’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글씨를 잘 쓰는 편은 못 되고 겨우 그려내는 정도이지만, 그렇게 새겨낸 글씨에 스스로가 담고 싶었던 무언가가 잘 담기기를 바라는 소망과 고민을 잉크처럼 묻혀 긋는다.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과 배치, 촉으로 종이를 누르는 압력을 포함해 획의 처음과 끝에 이르는 속도까지, 한 글자 한 획에도 자기 자신을 집어넣을 틈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완성해 낸 글씨가 남들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쓸 때의 내가 그 한 자(字)의 모양으로 그곳에 있다. 


  비단 붓글씨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글씨를 쓰게 되는 경우는 꾸준히 빈번하게 있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마다 마음에 남아 갈무리해 두었던 문장들을 공책에 필사하거나, 자꾸 곱씹게 되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옮겨 적어 두기도 한다. 두 달 정도에 한 번 차례가 돌아오는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한지는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 종이에다 간단한 메모를 적어 두기도 한다. 최근에는 출입명부를 작성해야 하는 곳이 많아 지면서, 대충 쓰면 행여라도 읽지 못할까봐 이름 석자와 연락처 등을 정성들여 적는다. 글씨를 직접 쓴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갈수록 직접 쓴 글씨를 서로 주고받을 기회가 많이 적어지는 것이 서로를 주고받을 기회가 하나 줄어든 것만 같아 아쉽다. 나조차도 글을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아무래도 키보드나 핸드폰 자판에 먼저 손을 올리게 된다. 써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펜을 잡을 일이 없다. 그럼에도, 글씨를 쓰는 행위에는 기계나 다른 어떤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만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썼든, 방금 막 쓰여진 글씨는 그 사람의 모든 필적(筆跡)의 끝에 있기 마련이다. 그 한 글자에 이르기까지 써 왔던 방대한 경험과 더불어, 그렇게 거쳐온 모든 글자에 담긴 습관과 생각들은 쓰는 이의 커다란 조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조형적인 잘 씀과 못 씀을 따지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을 벗어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글씨란 누군가가 그것을 직접 썼다는 사실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다시 찾은 코인노래방에는 여전히 많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손님들의 글씨는 제각각이었지만 하나같이 사랑스러웠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고맙습니다’고 적은 사장님의 글씨는 대견했다. 모든 포스트잇을 다 읽고나서 거듭 확신했다. 글씨는 사람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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